흥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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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생년월일은 모른다. 1617년(광해군 9년) 음력 11월 인목왕후[9]에 대한 폐비론이 불거졌을 때는 폐비에 찬성한 것 이외에는 딱히 두드러진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성품은 활달, 호방했고 그럭저럭 풍류를 즐기며 살던 평범한 왕족에 지나지 않았다.[10]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들과 내통하여 역모했다는 소문이 있어 대간들의 건의로 신료들이 위리안치를 논의했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고 공주로 피난갈 때 데리고 갔다. 하지만 도중에 일행을 빠져나와 이괄의 진중으로 도망갔고 이괄군이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자 왕으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곧 이괄군이 패배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소천 현감 안사성에게 붙잡혔다. 이후 한양으로 끌려간 뒤, 심기원 등에게 살해당했다.[11] 1871년(고종 8년) 고종 때 복권받아 시호 '효희'를 받았지만, 1900년(광무 4년) 완순군 이재완의 건의로 삭탈당했다.[12]
1624년(인조 2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들과 내통하여 역모했다는 소문이 있어 대간들의 건의로 신료들이 위리안치를 논의했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고 공주로 피난갈 때 데리고 갔다. 하지만 도중에 일행을 빠져나와 이괄의 진중으로 도망갔고 이괄군이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자 왕으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곧 이괄군이 패배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소천 현감 안사성에게 붙잡혔다. 이후 한양으로 끌려간 뒤, 심기원 등에게 살해당했다.[11] 1871년(고종 8년) 고종 때 복권받아 시호 '효희'를 받았지만, 1900년(광무 4년) 완순군 이재완의 건의로 삭탈당했다.[12]
3. 가계도 [편집]
[B] 1.1 1.2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선원속보에도 나오지 않는다.[2] 군호는 경상북도 성주군의 옛 이름인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에서 따왔다.[A] 3.1 3.2 1681년에 편찬한 《선원록(璿源錄)》과 1908년에 편찬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는 군호가 삭제되어 있고 휘만 적혀있다.[4] 1871년 복권, 1900년 삭탈.[5] 한 명은 친자. 한 명은 양자이다. [6] 1989년 평촌신도시 개발로 실전되었다. # 이 일대에 그의 군호를 딴 도로인 흥안대로가 있다.[7] 이괄의 난 당시 한양을 점령한 이괄에게 추대받았다.[9] 영창대군의 생모이자 흥안군의 적모.[10] 다만 일설에 의하면 행실이 매우 나빴다고도 한다.[11] 창덕궁 돈화문에 목매달려 죽었다. 다만 왕족의 처벌은 국왕의 허가가 필요한데 심기원은 인조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처형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인조가 크게 화를 냈고 심기원은 공적을 감안해서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인조의 눈밖에 나고 만다. 결국 심기원은 1644년(인조 22년) 만 57세로 반란죄에 얽혀 거열형으로 끔살당했는데, 사이가 나빴던 김자점이 무고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심기원도 죽을 때, 김자점도 똑같이 될 것이라고 증오를 퍼부으며 죽었는데 김자점도 결국 똑같이 거열형으로 죽었다.[12] 그래서 그런지 같은 해에 편찬한 《선원속보(璿源續譜)》에 흥안군에 대한 부분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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