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1600)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600년(선조 33년)에 태어났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에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1. 사건사고 [편집]
성격이 좀 괄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특히 사람들을 잡아다 감금하고 폭행한 게 많았다.
하도 경평군이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니자 일부에서는 "숱한 왕자들"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2] 그러자 경평군의 친형 흥안군과 이복형 인성군은 자신들까지 싸잡혀 욕먹는 게 억울하다며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 강가에다 정자를 지어놓고 무단으로 낚시터를 빼앗은 뒤 그 지역의 백성들을 고기잡고 나무하는 일에 부려먹었다.
- 관상감의 공물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3. 사망과 이후 [편집]
4. 여담 [편집]
5. 가족과 후손 [편집]
삭녕 최씨 부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이름 모를 소실 3명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딸 둘은 각각 주부 권엽과 직장 황윤정과 결혼하였다.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은 영양군 이현(嶺陽君 李儇)이며 서자는 영흥군 이창(嶺興君 李倀), 영주군 이파(嶺洲君 李𠐌), 영림군 이희(嶺臨君 李俙)이다. 영양군은 효종 때 1품에 가자되고 사은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다.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경평군의 5대손인 이택수(李澤遂)와 이양수(李養遂), 이회수(李會遂)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이 사사될 때 연루되어 1777년(정조 1) 이택수는 사형당했고, 이양수와 이회수는 각각 추자도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택수와 이회수는 1851년(철종 2년)에 복권되었다.#
유일한 적자이자 장남은 영양군 이현(嶺陽君 李儇)이며 서자는 영흥군 이창(嶺興君 李倀), 영주군 이파(嶺洲君 李𠐌), 영림군 이희(嶺臨君 李俙)이다. 영양군은 효종 때 1품에 가자되고 사은사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다.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경평군의 5대손인 이택수(李澤遂)와 이양수(李養遂), 이회수(李會遂)는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이 사사될 때 연루되어 1777년(정조 1) 이택수는 사형당했고, 이양수와 이회수는 각각 추자도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택수와 이회수는 1851년(철종 2년)에 복권되었다.#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