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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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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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완순군 이재완
完順君 李載完
군호
완순군(完順君)
성명
이을경(李乙經) → 이재완(李載完)
순칠(舜七)
석호(石湖)
출생
사망
1922년 8월 11일 (향년 66세)
목차
1. 개요2. 생애
2.1. 조선국 시절2.2. 대한제국 시절2.3. 생애 후반2.4. 일제강점기의 행적
3. 사후4. 여담5. 가족과 후손

1. 개요 [편집]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및 관료이다. 일제강점기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이다.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생애 [편집]

2.1. 조선국 시절 [편집]

1856년(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2]에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 음현령 이신오(李愼五)[3]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창군파의 10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인 흥완군 이정응양자가 되면서 경창군파 종가는 그의 하나 뿐인 남동생인 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뻘인 먼 친척 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4] 이 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5]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6]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 부사와 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이조, 예조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이재원[7]과 함께 경기도 부평[8]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대한제국 시절 [편집]

1897년(건양 2년) 2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한성은행을 설립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광무 2년) 홍문관 학사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한데 이어 1899년(광무 3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받고 종정원경 직을 겸임했다. 같은 해 9월에 족보고조할아버지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했기에[9] '완순군(完順君)'군호를 받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10] 1902년(광무 6년) 7월에는 평식원(平式院) 총재 직을 맡았다.

1903년(광무 7년) 2월에 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시키면서 은행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 육군부장이 되었고, 그 해[11] 8월에 승녕부 총관[12]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1909년(융희 3년) 7월 28일 한성은행 은행장 자리에서 밀려나 고문이 되었다.

2.3. 생애 후반 [편집]

2.4. 일제강점기의 행적 [편집]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1910년(융희 4년) 8월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2일에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의 발표로, 일본 정부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336,000엔을 하사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찬의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3. 사후 [편집]

1922년 8월 11일 오전에 사망했다. 향년 67세. 후작 작위는 그해 10월에 장남 이달용이 상속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13] 흥완군 묘소 근처에 있다.

묘소에 묘비는 없고 상석과 석물만이 세워져 있다. 죽기 직전에 〈한일합방조약〉에 대한 수치심으로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여담 [편집]

  • 1908년(융희 2년) 4월에 집을 고쳐 지을 때 양숙부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건물 30칸과 종정부 석재 전체를 사가서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14]
  • 1912년 9월에 4촌 형 흥친왕 이재면이 죽자 장례식을 회피하려던 당조카 영선군 이준용을 달래서 장례를 치뤘다. 이준용은 오랜 세월 정치적 이용만 하고 평생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게 했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었기 때문에, 장례식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며 질책했다고.

5. 가족과 후손 [편집]

완순군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완순군 차남), 이규용 부인 풍산 홍씨, 완순군 부인 달성 서씨, 완순군의 딸,
완순군 이재완, 이해선(완순군 장손), 이달용(완순군 장남) 부인 안동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
정경부인 서씨 사이에서 2남 1녀를 얻었다. 장남은 이달용(李達鎔), 차남은 이규용(李逵鎔)이다. 이달용의 가계는 이달용 문서 참조.

이규용은 비서원승을 지낸 풍산 홍씨 홍순구의 딸과 혼인했다.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 음력 을묘년 12월 5일.[2]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읍.[3]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4]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5] 童蒙敎官. 조선시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6]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7]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8] 지금의 인천광역시 북부 및 북동부, 경기도 부천시 일대.[9]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서의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10] 군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박씨의 본관 순천의 '순(順)'에서 따왔다.[11]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7월에 연호융희로 바뀌었다.[12] 承寧府. 황제가 쓰는 물품 · 의복 · 거마(車馬) 등을 조달, 관리하며 이에 관련된 회계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했던 궁내부 산하 관청.[13]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14] 당시 기사 :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 자 대한매일신보.
파일:완순군운현궁30칸사(대한매일신보1908.4.2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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