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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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2. 유래3. 성씨 관계4. 분파5. 족보 위조 의혹
5.1. 《김은열 묘지명》5.2. 《신라경순왕전비》5.3. 현재
6. 유명인7.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신라왕성이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약 4%.

전국에서 4번째로 흔한 성씨. 인구는 2015년 기준 1,888,121명으로 김씨 중에서는 4,456,700명의 김해 김씨 다음 가는 숫자로 분포하는 성씨로 되어 있으며 전체 김씨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굉장히 많은 집안답게 강원도제주도는 물론이고 이북 지역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본관에 따라 경상북도에 인구가 많지만 의외로 수도권 지역, 전라북도[3], 충청남도[4]이북[5][6] 지역에도 인구가 꽤 많다.

2. 유래 [편집]

경주 김씨 시조는 신라 김알지로 그가 탈해 이사금 시절에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최초의 김씨왕은 신라 13대왕인 미추 이사금이며 내물 마립간 김씨 왕조 지배의 기틀이 잡혔다.

법흥왕 때 신라에 문화 전반에 개혁이 있었을 때 성씨를 사용하는게 유행하면서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이, 진흥왕 때부터라고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은 한국 최초로 김씨로 기록된 인물이다.[7]

신라인들의 경우에는 (경주)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여겼으며 이는 《삼국사기》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김인문묘비』
또한 태조 성한왕이라는 인물이 『김인문묘비』와 『문무왕릉비』, 『흥덕대왕비문』에 등장하고, 투후 김일제도 김씨 성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학계에서는 태조 성한을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최초의 김씨성의 임금인 미추 이사금을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3. 성씨 관계 [편집]

사실 경주 김씨는 월성 김씨(月城 金氏)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경주 김씨로 알고 있는데 가족관계등록부에 월성(月城)으로 나온다고 멘붕은 금지.[8] 애초에 지명이 경주 월성이다. 실제로 집성촌과 족보에서는 스스로를 경주 김씨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족보도 경주 김씨 종친회의 관리 아래에 있으므로 월성이라고 분파가 아니라 같은 씨족으로 대우받으며 시조와 왕릉에 대해서는 같이 제사도 올린다[9]. 이 때문에 합법적으로 동성동본결혼할 수 있었으며, 종친회와 가깝지 않는 이상 욕먹을 리도 없었다.

4. 분파 [편집]

고려 말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신라 김씨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했으며, 대표적 파조들은 다음과 같다.

분파된 후손들 중 태사공파 지파인 상촌공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그 다음에는 장군공파 지파인 계림군파, 벽상공신내사령공파의 지파인 수은공파 순이다. 참고로 김씨들 중에서 이름 중간에 '학'자나 '관'자가 들어가는 항렬이면 계림군파이고, 이름 중간에 '택'자가 들어가는 항렬이면 상촌공파이다.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된 성씨로는 김녕 김씨(법흥파 김해 김씨), (구) 안동 김씨,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원주 김씨, 전주 김씨[18], 안동 권씨[19], 수성 최씨[20] 등이 있다. 이 성씨들의 인구를 다 합하면 약 600만명이 넘는다.

경순왕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등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는 경주 김씨 외에도 의성 김씨, (후)강릉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등이 있다.

5. 족보 위조 의혹 [편집]

조선조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내려지면서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지고, 일제 강점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 씨족들이 너도나도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도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이고 선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 위·변조가 극에 달하였다.

5.1. 《김은열 묘지명》 [편집]

조선 후기인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서술한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고려에 항복한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을 후비로 맞아들여 8남을 더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일(鎰) · 굉(鍠) · 명(鳴) · 은열(殷說) · 중석(重錫) · 건(鍵) · 선(鐥) · 종(鐘)이라 한다. 또 2자 굉(鍠)의 묘지석도 발견되었는데 ,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유공지신(有功之臣), 특사장지(特賜葬地)하였다고 한다.

이듬해인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하면서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보국대안군 은열공 묘지명》을 추기하였는데, 여기서는 2자 '굉'을 '황'(湟)으로, 3자 '명'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의 시호를 '보국대안군'이라고 지어내는 등 가필을 넘어 거의 작문 수준에 가깝게 서술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의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공통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찬(撰)한 사람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으며,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 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정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된 사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러한 묘지명은 신빙성이 없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5.2. 《신라경순왕전비》 [편집]

이후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은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를 세웠는데,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제1자부터 3자인 일(鎰) · 굉(鍠. 또는 황(湟)) · 명(鳴. 또는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비문에 경순왕은 전비(前妃) 박씨와의 사이에 태자(太子)·차자(次子) 이외에 제3자 '영분공'(永芬公)을 더 두었는데, ‘영분공파’ 파조라 한다. 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金禮謙)은 그의 5세손이라 한다. 또 제4자 은열(殷說)은 고려조에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해졌다고 하며, ‘대안군파’ 파조라 한다. 평장사 김봉모(金鳳毛)는 그의 6세손이라 한다.

5.3. 현재 [편집]

이후 경순왕 제3자가 '김명종'이라 하며, 영분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또 경순왕 제4자가 '김은열'이라 하며, 보국대안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경주 김씨 대안군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이와 같이 경순왕 후손이라는 일부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조선조 말에 와서 상계를 경순왕 왕자대 까지 끌어 올려 시호와 군호를 붙였다.
  • 영분공파: 파조 영분공 김명종(金鳴鍾)
  • 대안군파: 파조 대안군 김은열(金殷說)

6. 유명인 [편집]

신라가 멸망해서도 경순왕이 순순히 나라를 바친 덕분인지 고려의 문벌귀족으로서 대우를 받았으며[21][22] 조선 시대에도 노론 벽파에 드는 등 승승장구 하였다. 다만 나중에는 본격 세도정치를 시작하는 신 안동 김씨에게 축출당하기도. 이 시대의 유명한 인물로는 정순왕후 김씨, 추사 김정희김홍집을 들 수 있을 듯.

현대에도 워낙에 숫자가 많다보니까 경주 김씨 인물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본명을 기준으로 하였다.

7. 관련 문서 [편집]

[1] 많은 신라계 김씨의 원시조 이지만 정식 역사서에서는 실존인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2]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다.[3] 고려 말 충신 6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 농은 민안부) 중 하나였던 수은 김충한 공이 조선조를 피해 남원으로 낙향하여 수은공파가 남원, 임실 등지에 많이 산다.[4] 특히 상촌공파와 계림군파가 더욱 그렇다. 참고로 상촌공파는 충청남도 서부, 경기도 북부, 강원도, 이북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5] 참고로 이북 지역에 있는 경주 김씨 집성촌의 무려 80%가 상촌공파 집성촌이다(…).[6] 단, 북한에서는 성씨의 본관을 구 시대부터 존재한 일종의 계급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본관을 기록하거나 남들에게 물을 일은 없다고 한다.[7] 물론 법흥왕과 진흥왕 이전에도 혈족의 계보는 계속 이어져왔지만, 김(金)이라는 한자를 이름 앞에 붙이는 '성'으로 사용한 것은 이때가 최초라는 것이다. 한자 사용이 유행하면서 한자 성씨를 쓴 것은 김씨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들도 마찬가지.[8] 이는 경주 이씨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경주에 월성군이 있었다. 경주=월성이라고 보면 된다.[9]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일제시절 호적의 영향이 크며 그 호적을 그대로 물려받은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10]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의 후예라 한다.[11] 고려 평장사 정평공.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 후예라 한다. 전주 김씨로 분적했다.[12]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 9세손이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이며, 추사 김정희가 속한 선대 계파로, 판도판서공파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증명할 사료가 없어서 대보공 김알지의 먼 후손이라고 칭하고 있다. 덧붙여서 헌강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존재한다.[13] 고려 말 판도판서. 판도판서공파보를 보면 대개 경순왕의 후손이라 하나, 경순왕의 후손임을 증명할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해서 그냥 김알지의 후예라고 하기도 한다.[14] 고려 초 장군. 원성왕의 후예라 전하나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 후예라고도 한다. 김홍집이 속한 계파이다. 13세손이 조선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이며, 일부에서는 대장군공파의 명칭을 태자파로 변경하고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바꾸면서 다른 신라계 김씨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15]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자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김위영의 손자이다. 족보에선 김위영이 경순왕의 후손이라 하나, 김위영은 사실 경순왕과 동시대 인물이다. 후대 사람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경순왕 후손으로써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억지로 동시대의 두 인물을 조상과 후손의 관계로 연결한 것.[16] 계림군 김균의 9세손이다. 상서(尙書).[17] 15세기 초반인 태종~세종 대에 활동하였다. 목사(牧使).[18] 놀랍게도 김일성의 본관이다.[19] 시조인 권행(權倖)이 권씨 성을 사성받기 이전에 경주 김씨였다.[20] 경순왕의 고려 귀순 후 그의 후예 김영규(金永奎) 후손[21] 정작 본인의 후손들은 경주 김씨에서 다른 본관으로 갈라져 나왔다.[22] 대표적으로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이 있다. 하지만 아들놈 때문에 망했어요...[23] 묘에서 "慶州金六十二世" (경주 김씨의 62세손).[24] 도지삽니다 그 사람 맞다.[25] 위의 김기리의 선배지만 항렬은 김기리보다 한 세대 낮다(...)[26] https://youtu.be/Pu47A-6By8U?t=148[27] 김윤아도 경주김씨고, 남편 김형규도 같은 경주김씨다.[28] 여담으로 사실 이 인물은 2013년에 개봉한 영화 파파로티에서 배우 이제훈이 맡았던 주인공 '이장호'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써 영화 파파로티의 실제 주인공이 바로 이 김호중이다. 그래서 파파로티 극중에서 주인공 이장호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다 이 김호중이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라고 한다.[29] https://youtu.be/Pu47A-6By8U?t=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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