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1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비석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1]이라는 글씨를 크게 새겼으며 뒤(왼쪽)에 작은 글자로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2]라는 글씨가 있다.
원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 대원군의 명령하에 처음 만들어졌고 1871년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두 번의 양요를 다시는 겪지 않는다는 뜻에서 또 조국을 침범하여 피해를 입힌 양놈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과 위정 척사파 및 유림들의 확고한 입장과 강경책 등을 담아 지어졌다.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워지게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정치에서 실각되고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여 실권을 잡게되고 문호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 대원군의 명령하에 처음 만들어졌고 1871년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두 번의 양요를 다시는 겪지 않는다는 뜻에서 또 조국을 침범하여 피해를 입힌 양놈들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과 위정 척사파 및 유림들의 확고한 입장과 강경책 등을 담아 지어졌다.
신미양요 이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세워지게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정치에서 실각되고 명성황후 민씨가 환궁하여 실권을 잡게되고 문호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종종 척화비를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3. 현황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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