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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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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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권택(林權澤) |
출생 | |
본적 |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2] |
본관 | |
국적 | |
학력 | |
성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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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파일:attachment/lim_geun_tak.jpg
임권택(林權澤)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자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교수다.
한국 영화 감독들 가운데에서도 정말 살아있는 거장 대우를 받는다. 평론가들 입장에서도 너무 거인이라 비평하기 난감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영화평론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성일이 지대한 임권택 팬. 한국 영화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정성일의 평론은 임권택의 영화 세계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광주숭일고등학교 시절에는 전라남도 광주(당시 행정구역)에서 자랐다. 1956년에 서울에 가서 살았고, 1962년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 부친이 북한에 관련되어서 지만원의 연좌제 처벌 망언이 나올 당시 걸려드는 위인[6]들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배우 권현상(본명 임동재)이 그의 아들이다.
임권택(林權澤)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자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교수다.
한국 영화 감독들 가운데에서도 정말 살아있는 거장 대우를 받는다. 평론가들 입장에서도 너무 거인이라 비평하기 난감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영화평론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성일이 지대한 임권택 팬. 한국 영화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정성일의 평론은 임권택의 영화 세계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광주숭일고등학교 시절에는 전라남도 광주(당시 행정구역)에서 자랐다. 1956년에 서울에 가서 살았고, 1962년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 부친이 북한에 관련되어서 지만원의 연좌제 처벌 망언이 나올 당시 걸려드는 위인[6]들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배우 권현상(본명 임동재)이 그의 아들이다.
2. 작품 세계 [편집]
롱테이크(서편제의 3분 롱테이크)나 플래시백(과거로 회상) 등의 기법을 잘쓰며, 굉장히 퀄리티가 뛰어나고 영상에 숙달된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1962년에 데뷔한 이후로 1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년에 몇편씩 만드는 것이다(...).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대부분은 1960~1970년대 작품들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제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의 수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7] 당시 기술력이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결국 최고의 교육은 많이 만들어 보는 것이다(...).[8]
그렇게 저예산 반공, 반일 영화를 다작하다가 노하우가 쌓인 1980년대부터 임권택 감독의 눈은 한국의 전통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해외 시상식에 나갔다가 해외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을 돌아본 임권택 감독은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전통을 돌아보는 문예영화, 예술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대표 예술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연출하면서 만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꾸준히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로 나온 영화는 모두 이태원 제작이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두 사람은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임권택 회고전이 열렸다.
정성일 평론가가 임권택 감독의 전 작품을 보고 평론을 쓰는 임권택x102라는 연재 칼럼이 있다. 링크
정성일 평론가 오디오파일#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대부분은 1960~1970년대 작품들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제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의 수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7] 당시 기술력이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결국 최고의 교육은 많이 만들어 보는 것이다(...).[8]
그렇게 저예산 반공, 반일 영화를 다작하다가 노하우가 쌓인 1980년대부터 임권택 감독의 눈은 한국의 전통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해외 시상식에 나갔다가 해외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을 돌아본 임권택 감독은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전통을 돌아보는 문예영화, 예술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대표 예술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연출하면서 만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꾸준히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로 나온 영화는 모두 이태원 제작이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두 사람은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임권택 회고전이 열렸다.
정성일 평론가가 임권택 감독의 전 작품을 보고 평론을 쓰는 임권택x102라는 연재 칼럼이 있다. 링크
정성일 평론가 오디오파일#
3. 수상 [편집]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총 13회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감독 중 최다 기록으로, 2위 기록인 6회 수상과는 무려 더블스코어 이상의 차이. 또한 2000년에는 대한민국 감독 중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또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구로사와는 임권택 영화에서 베스트 3을 꼽으면서 만다라,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금값만 해도 꽤나 나갈듯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상을 주면서 만약 팔거라면 우리한테 되팔라고 농담을 했었다고.. 현재 이 황금곰상은 임권택이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해서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 (아카이브)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구로사와는 임권택 영화에서 베스트 3을 꼽으면서 만다라,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4. 작품 목록 [편집]
여기 소개된 것은 어디까지나 일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년작.
만주 웨스턴으로,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놀랍게도 독립군과 일본군이 스키 타면서 총격전을 하는 장면 때문에 인기를 몰았다(...).시모 해위해훗날 개봉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키 총격전이 연상되는 부분.[9] 왠지 훗날 회고에 의하면 늘 부끄러웠다며 후회했다고 하신다.
- 울지 않으리 1974년작.
조흔파의 고교얄개 주연인 이승현이 나오는 반공 영화로, 놀랍게도 어린이가 사람들을 죽인다(...). 수류탄 던져서 죽이거나, 권총으로 쏘는 장면 등...당시 신문에는 증언에 이은 스펙터클한 영화라고 한다. 하긴 어린이가 사람을 총질하거나, 수류탄 던져서 죽이는건 확실히 스펙터클하긴하다(...). 그런데 인민군 앞잡이 아들을 주인공(이승현)이 받아들이는건 감독 자신의 과거가 반영되어서 이랬으면 어떨까?가 반영된것 같다. 미국에서 나중에 나온 레드 던이 생각나게 한다...실제 레드던 리메이크에서는 북한군이 적으로 나온다(!)하지만 레드던은 고등학생이 북한군을 상대하고, 여기서는 초등학생이 살인을 하는거라서 당연히 문제가 된다.
-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6년작.
- 족보 1978년작.
- 가깝고도 먼 길 1978년작.
어린이들이 휴전선을 넘다가 피격당해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내용. 어린이가 총에 맞아 살해된다는 충격적인 결말때문에 짤려서 방영되기도 했다. 로드 무비로 작품 내의 다른 공간(집이라든가)은 대부분 주인공들의 회상이다.(플래시백)
- 만다라 1981년작.
임권택을 예술영화감독으로 본격적으로 해외에 알린 작품. 해외 평론가들 호평과 같이 해외에선 DVD로도 나왔다.
- 아벤고 공수군단 1982년작.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년작.
- 장군의 아들 1990년작.
김두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간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제작만 고집했던 임권택 감독에게 이태원 사장이 쉬어가라는 의미로 메가폰을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기성배우들을 캐스팅 하려고 하였으나, 모험삼아 새 얼굴로 캐스팅 해보자고 했는데...이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줄이야. 당시 단성사에 개봉하여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거두면서 흥행으론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던 임권택 영화나 단골 제작자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을 놀라게 했다. 30년이 된 지금도 '대표적인 배우 오디션'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이며,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걸출한 새 얼굴들을 탄생시켰는데 주인공 김두한 역할을 맡은 박상민과 악역 하야시 역할의 신현준을 포함하여 김승우, 이일재, 김해곤(감독 겸 배우) 등등...이 배우들은 199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배우 세대교체를 이뤄내기도 했고, 3편까지 만들어졌다. 서편제의 100만 기록에 기폭제가 되었다.
- 서편제 1993년작.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 송화의 예술혼과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룬 영화.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영화 중 하나이다.
소설가 이청준이 5부 구성으로 쓴 단편 연작 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참고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100만 관객 돌파라는 희대의 대기록도 세웠다.[12]
상해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북한 영화인들이 보고 저질영화라고 까는데에만 열중했다(...).북한엔 제대로 된 영화라는 게 있긴 있었던가더불어 이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온 올리버 스톤은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무시당한 일이 있었다.
여담인데 이태원 사장이 장군의 아들 2(1992)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개벽의 대참패로 인한 부담도 씻으면서 "어디 흥행은 개의치 않고 마음껏 만들고 싶은 걸로 만들어보세요"라며 부담을 안 주고 제작비[13]를 대주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사상 최고 대박을 거두면서 감독 본인과 사장을 놀라게 했었다. 물론 당시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목적의 단체관람 유행도 한 몫을 했다.
5. 비판 및 사건사고 [편집]
5.1. 흑역사 [편집]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벌어먹고자 1960년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당시는 반공 영화가 국책사업이었다.).2007년도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질문자)
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워낙 다작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웃지못할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Q:정말 많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다 기억하세요?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놈이 이런 재미없는걸 만든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20]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보면 감독이 감독이니만큼 특출난 부분도 많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 연구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본인은 이런 재평가 자체도 꽤나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참고로 그때 영화 만들어서 번 돈으로 술을 많이 마셨는데 돼지껍데기를 가장 좋아하는 안주라고 한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으나, 그간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망작을 연출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본인은 예산(200억 원)이 부족했다는 핑계를 대고 있으나,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돈이 오히려 부족하진 않았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그리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1988 서울 올림픽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독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그저 그런 범작 정도로나 평가받고 빨리 묻혀졌다.
5.2. 강제 베드신 및 협박 [편집]
엄연한 범죄 행위라면 강제 베드신 사건이 존재한다. 영화 《길소뜸》 촬영 당시 15세, 즉 중학교 2학년였던 이상아에게 강제로 노출 장면(뒷모습)을 촬영하게 한 사실이 세바퀴를 통해 밝혀졌다. 대본도 안 주고 연기를 시키다가, 필요한 시점이 되자 전라 베드신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받아 마땅한 사건이다.
춘향뎐 촬영 시에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승우의 인터뷰에 의하면 베드신 촬영 이후 술을 마셔야 잠에 들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고 이효정 역시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조용히 은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춘향뎐 촬영 시에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승우의 인터뷰에 의하면 베드신 촬영 이후 술을 마셔야 잠에 들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고 이효정 역시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조용히 은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 제14회 시상식부터 대상 신설[2]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3] 장수공파 30세 택(澤) 순(淳) 항렬.[4] 1951년생 배우. 임권택과는 1973년 혼인 신고를 한 후 197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5] 장남 임동준은 영화 프로듀서로, 차남 권현상(본명 임동재)은 배우로 활동중이다.[6] 우습게도 이문열도 여기에 해당되기에 팀킬 사례라고 비웃음을 많이 듣는다. 그밖에 이현세도 연좌제 처벌에 해당된다.[7] 출처 -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2004년 인터뷰.[8] 하지만 여러 인터뷰등의 내용을 보면 임 감독은 그 시절을 자신의 흑역사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9] 후에 다찌마와 리에서도 패러디(...)되었다.[10] 다만 근본적으로 반공 영화이기 때문에 인민군만나쁘고,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건 일절 나오지 않는다.[11] 뒷모습이며 배경이 어두워서 직접 노출되지 않았지만 문제가 되었다.[12] 당시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는 1979년 작인 성룡 주연의 홍콩 무협영화 취권이었다. 당시 서울 98만 관객을 동원했다고...참고로 1990년 엄청난 대박이던 영화인, 서울 92만 관객이 본 사랑과 영혼같은 영화와 견줘도 얼마나 대박인지 알 수 있을 듯. 다만 사랑과 영혼은 전국 350만 관객이 보면서 전국 관객 2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서편제가 좀 더 낮다.[13] 그래서 임권택도 제작비를 그리 많이 들지 않게 찍었다고 한다.[14] 하지만 상영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고, 영화 '접속'이 롱런하고 좋은 평가가 많았던 반면, 이 영화는 특히 여성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지 않았다.[15] 물론 작품 배경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보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겠지만, 개봉이 상대적으로 여권에 대한 의식도 있었고 실제로 여권신장도 꽤 진행되었던 시점임을 생각한다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인권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어디서 어떻게 봐도 여성들에게 편한 작품은 아니다.[16] 당시에 이효정은 16세였는데 길소뜸과 달리 짧지만 이건 직접 노출하고 나름 베드신도 소화했다.[17] 펀치 드렁크 러브와 공동수상했다.[18] 김용옥은 위에 언급한 개벽과 장군의 아들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여기에 얽힌 비화도 꽤 있다.[19] 서편제에서는 오정해의 한 관련 이야기에 치중해서 김규철의 고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서는 완전히 현시창.[20] 이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만든 영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는 건 재미있는 얘기이긴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는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빙 돌려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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