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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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時亨 | ||
1827년 ~ 1898년 | ||
최시형(崔時亨) | ||
해월(海月) | ||
생몰 기간 | 1827년 ~ 1898년 | |
비고 | 동학의 2대 교주 | |
1. 소개 [편집]
2. 생애 [편집]
1827년 경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초명은 경상(慶翔)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되어서 한때 조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노동을 하다가 1861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할 당시 최시형은 머슴으로 생계를 잇는 처지였는데 최제우가 철저하게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골랐음을 보여주는 대목. 1864년 제1대 교주 최제우가 조정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자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어 신도들을 이끌었다.
이후 태백산에 은신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고 안동, 울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에 은신하였다. 1892년 교조의 신원, 동학 활동의 자유,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며 1893년 한양으로 올라와서 동학 대표 40명을 통해 당시 임금 고종 앞에서 통곡하며 청원하여 고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으나 시행되지 않자 충청북도 보은에서 척왜 운동,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조정에서 충청도 관찰사 등을 해임하자 최시형도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전봉준, 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간청하고 밑의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하였다. 1895년 전봉준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장수에서도 패배하자 몸을 숨겼다. 1898년 강원도 원주에 머물던 중 반역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때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한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것.
말년에 한양에서 숨어지내며 손병희의 여동생 손소사와 결혼하여 장남 최동희, 차남 최동호를 낳았다. 두 아들은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태백산에 은신하며 포교 활동을 하였고 안동, 울진 등의 고을을 돌며 포교하다가 소백산에 은신하였다. 1892년 교조의 신원, 동학 활동의 자유, 포교 활동의 자유 등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하였으며 1893년 한양으로 올라와서 동학 대표 40명을 통해 당시 임금 고종 앞에서 통곡하며 청원하여 고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으나 시행되지 않자 충청북도 보은에서 척왜 운동,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운동 등을 벌였다. 이후 조정에서 충청도 관찰사 등을 해임하자 최시형도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의 접주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 계획에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전봉준, 손병희 등이 계속해서 간청하고 밑의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동참하고 지지를 표하며 활동하였다. 1895년 전봉준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자 충청남도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장수에서도 패배하자 몸을 숨겼다. 1898년 강원도 원주에 머물던 중 반역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때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한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것.
말년에 한양에서 숨어지내며 손병희의 여동생 손소사와 결혼하여 장남 최동희, 차남 최동호를 낳았다. 두 아들은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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