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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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출생 | |
본관 | |
재임기간 | 제16대 후반기 국회의장 |
1. 개요 [편집]
국회의장 출신 정치인.
2. 생애 [편집]
1938년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태생으로 동래고등학교, 동아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재학 중이던 1960년 선배 서석재와 함께 4.19 혁명을 주도하였다. 이후 신민당 국회의원이던 이기택의 비서관으로 들어오며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이기택이 정치규제자로 선정되자 부산직할시 동래구 지역구를 물려받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고 민주정의당 김진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4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몸담게 되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당선되며 1987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통일민주당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강경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해 국회 통일정책특위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주도하자 이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92,353표)로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93년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1994년까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부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2002년 제16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때 본인의 국회의장 임기 말에 일어났던 그 유명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탄핵소추안을 직접 가결시킨 장본인이었다.[13][14] 이후 국회의장 임기 종료 후에 바로 정계은퇴를 하였다.[15]
이후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면서 당명이 바뀌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고문으로 있다. 박관용의 비서관이었던 이진복은 동래구청장을 지냈으며 이후 18대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내리 3선을 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이기택이 정치규제자로 선정되자 부산직할시 동래구 지역구를 물려받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고 민주정의당 김진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4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몸담게 되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당선되며 1987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통일민주당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강경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해 국회 통일정책특위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주도하자 이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92,353표)로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93년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1994년까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부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2002년 제16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때 본인의 국회의장 임기 말에 일어났던 그 유명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탄핵소추안을 직접 가결시킨 장본인이었다.[13][14] 이후 국회의장 임기 종료 후에 바로 정계은퇴를 하였다.[15]
이후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면서 당명이 바뀌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고문으로 있다. 박관용의 비서관이었던 이진복은 동래구청장을 지냈으며 이후 18대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내리 3선을 했다.
3. 불법 정치자금 사건 [편집]
4. 소속 정당 [편집]
5. 선거 이력 [편집]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제4선거구)[20] | 71,863 (24.46%) | 당선 (2위) | 초선[21]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래) | 145,233 (36.58%) | 당선 (2위) | 재선[22]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래) | 93,550 (59.99%) | 당선 (1위) | 3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래 갑) | 92,353 (65.81%) | 당선 (1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래 갑) | 42,748 (63.75%) | 당선 (1위) | 5선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래) | 67,742 (58.15%) | 당선 (1위) | 6선[25] |
6. 둘러보기 [편집]
[A] 1.1 1.2 동래구의 제12대 국회의원[B] 3.1 3.2 부산 제4선거구의 제11대 국회의원[C] 동래구 갑의 제13대 국회의원[D] 동래구 을의 제13대 국회의원[E] 7.1 7.2 동래구의 제12대 국회의원[9]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으로 인한 의원직 사퇴[F] 동래구의 제16대 국회의원[G] 동래구 갑의 제15대 국회의원[H] 동래구 을의 제15대 국회의원[13] 가결을 선포하면서 "대한민국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꼭 전진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당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후 탄핵 소추라는 범국가적 결단을 내릴 때 이 말을 재활용하는듯 보인다. 여러모로 관행제조기.[14] 그리고 결국 가결이 된 후 당시 통곡하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향해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5] 국회의장을 맡은 정치인은 다음 임기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관행을 만든 장본인이다. 보통 5선 이상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을 맡으므로 보통 정계 은퇴 시즌을 맞는 단계가 맞다.[16] 대한민국 삼부요인들은 금고형 이상의 법적 처벌을 받거나 본인의 유언이 있지 않는 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단, 총리는 삼부요인이 아니기 때문에 안장 대상이 아니다.[17]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8]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9]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20] 동래구 일원[21] 1984년 탈당(신한민주당 입당)[22] 1987년 탈당(통일민주당 입당)[23] 전국 최다득표[24] 1993년 의원직 사퇴(대통령 비서실장 임명)[25] 16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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