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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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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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한샤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 (페르세폴리스)
朝貢, Tribute
전근대에 제후가 종주국에게 바치는 예, 또는 그것으로 구성된 국제 질서. 조회 참례를 의미하는 조(朝)와 공물을 의미하는 공(貢)으로 이루어진다. 조공의 반대 개념으로는 책봉이 있으며, 조공을 통해 황제는 국가의 신하들에게 책봉을 내렸다.
샤한샤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 (페르세폴리스)
朝貢, Tribute
전근대에 제후가 종주국에게 바치는 예, 또는 그것으로 구성된 국제 질서. 조회 참례를 의미하는 조(朝)와 공물을 의미하는 공(貢)으로 이루어진다. 조공의 반대 개념으로는 책봉이 있으며, 조공을 통해 황제는 국가의 신하들에게 책봉을 내렸다.
2. 특징 [편집]
원래 천자와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주나라에서 채택된 제도로, 천자와 제후의 개념이 중국의 경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로 개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교 관례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국내에서도 행해졌지만, 점차 황제권(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실질적인 의미의 제후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조는 망궐례[1] 등으로 간소화되고, 공은 세금화되었다.
조공 무역의 이익과 손해도 매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당시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이익과 손해가 달라지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딱히 당시 국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사치품을 잔뜩 받고 중요한 전략 자원인 말 같은 것들을 주면 지금 관점에서는 손해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이익이고 다른 무역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학비 취급을 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이자 각국 정부 간의 공무역이었고,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외교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였다.
송나라 때는 일부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히 과장되기는 했지만 상대국인 송나라의 안습한 외교적 현실을 적절히 이용해서 나름 실리도 챙기고 체면도 살렸다. 잠재 적국인 거란을 부족한 군사력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송나라는 몇 안 되는 우호국인 고려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넷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알고 싶다면 출처인 동란섭필,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등을 직접 참고하는 편이 더 낫다. 고려 사신이 양아치로 보일 수준으로 과장된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다르다. 하지만, 소동파가 고려를 맥적(貃敵)이라고 힐난할 정도로 고려와의 조공무역이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것은 사실이다. 안 그래도 송의 재정은 전연의 맹으로 인해 요나라에 세폐를 바쳐야 했고 서하에도 비슷하게 바쳐야 했느네 고려와의 무역까지 겹치니 뭐... 그리고 과장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결코 '예의 바르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참고로 고려 사신들의 깡패 짓은 거란에서도 계속되었다. 여요전쟁 이후로는 몇 번의 무력 분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관계가 우호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남의 나라에서 거란인들의 변발을 잡고 폭행을 하면서 모욕을 주는 등의 문제는 있었다. 조선으로 치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이후 청나라로 간 조선 사신들이 만주족에게 깡패 짓을 한 셈이다.[2]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라고 하여 요나라 사신에 준하여 대접했다. 일설에 따르면 고려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송나라의 메뉴얼은 1300장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 전기의 조공-책봉의 모습은 이후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되면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조공 무역의 이익과 손해도 매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당시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이익과 손해가 달라지기도 한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딱히 당시 국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사치품을 잔뜩 받고 중요한 전략 자원인 말 같은 것들을 주면 지금 관점에서는 손해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이익이고 다른 무역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학비 취급을 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이자 각국 정부 간의 공무역이었고,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외교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였다.
송나라 때는 일부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히 과장되기는 했지만 상대국인 송나라의 안습한 외교적 현실을 적절히 이용해서 나름 실리도 챙기고 체면도 살렸다. 잠재 적국인 거란을 부족한 군사력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송나라는 몇 안 되는 우호국인 고려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넷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알고 싶다면 출처인 동란섭필,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등을 직접 참고하는 편이 더 낫다. 고려 사신이 양아치로 보일 수준으로 과장된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다르다. 하지만, 소동파가 고려를 맥적(貃敵)이라고 힐난할 정도로 고려와의 조공무역이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것은 사실이다. 안 그래도 송의 재정은 전연의 맹으로 인해 요나라에 세폐를 바쳐야 했고 서하에도 비슷하게 바쳐야 했느네 고려와의 무역까지 겹치니 뭐... 그리고 과장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결코 '예의 바르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참고로 고려 사신들의 깡패 짓은 거란에서도 계속되었다. 여요전쟁 이후로는 몇 번의 무력 분쟁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관계가 우호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남의 나라에서 거란인들의 변발을 잡고 폭행을 하면서 모욕을 주는 등의 문제는 있었다. 조선으로 치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이후 청나라로 간 조선 사신들이 만주족에게 깡패 짓을 한 셈이다.[2]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라고 하여 요나라 사신에 준하여 대접했다. 일설에 따르면 고려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송나라의 메뉴얼은 1300장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 전기의 조공-책봉의 모습은 이후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되면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아국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링크 ㅡ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고려 국가 외부의 존재하는 군주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국내의 정치, 의례에 작용했기 때문이다.[3]
14세기 말 몽골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재,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은 반발하며 강력한 항의를 하자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서 강력히 반발했다. 이는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왕자의 난으로 리타이어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각궁)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참고자료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2.1. 유럽의 경우 [편집]
원래 전근대 유럽권은 기본적으로 종교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전제 하에서[4] 서양의 왕 또는 공작, 선제후들은 한 군주가 여러 지역의 수장이 될 수 있었고, 백작이나 후작, 공작 등의 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였다. 선제후국들의 선제후들은 영토 내에 봉건적으로 존재하며, 비독립적이고 병역과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유럽의 중세 초기에는 동북아시아와 비슷하게 각국의 왕이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국의 신하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여러 게르만족들이 난립하여 왕국을 세우고, 게르만족 장군인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제국에게 왕위를 인정받고 서로마를 한 때 지배한 적도 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확실히 동로마에 소아시아 지역 또는 유목 민족들을 상대할때 군사적 도움이 될수 있는 게르만족이 필요하였고 교황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예 유력한 서유럽 왕국의 군주를 새로 황제로 옹립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책봉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서로마 제국 또한 선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이중 제국의 형태가 시작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분열된 후에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로마 황제에 대한 의무를 지닌 선제후들이 존재하였고, 동로마 제국 또한 러시아의 공국들에게 공작을 하사하는 봉건 제도가 존재하였다. 이런 제도는 통일 로마 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고대의 로마 제국도 이런 식으로 자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의 군주나 유력자를 현지의 왕으로 책봉하였고[5], 일부는 그 댓가로 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오도록 하여 로마식 교육을 시켜주고[6], 작위를 책봉받기 전까지 고관대작으로 임용하는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안도라는 1993년에 국민 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공동영주인 스페인 우르헬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조공을 바쳤다. 워낙 작은 나라고 유럽의 정세구도상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 유린이나 탄압이 없어서 낡은 제도가 20세기 말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안도라는 1년씩 번갈아가며 프랑스 대통령에게 현금 960프랑(약 14만원)을, 우르헬 주교에겐 현금 460페세타(약 3,000~4,000원)와 6개의 햄, 6개의 치즈 그리고 12마리의 닭을 보냈다. 이것이 그들의 주군에게 바치는 조공이었다. 이는 1993년 입헌공동군주제가 되면서 폐지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확실히 동로마에 소아시아 지역 또는 유목 민족들을 상대할때 군사적 도움이 될수 있는 게르만족이 필요하였고 교황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예 유력한 서유럽 왕국의 군주를 새로 황제로 옹립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책봉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서로마 제국 또한 선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이중 제국의 형태가 시작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분열된 후에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로마 황제에 대한 의무를 지닌 선제후들이 존재하였고, 동로마 제국 또한 러시아의 공국들에게 공작을 하사하는 봉건 제도가 존재하였다. 이런 제도는 통일 로마 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고대의 로마 제국도 이런 식으로 자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의 군주나 유력자를 현지의 왕으로 책봉하였고[5], 일부는 그 댓가로 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오도록 하여 로마식 교육을 시켜주고[6], 작위를 책봉받기 전까지 고관대작으로 임용하는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안도라는 1993년에 국민 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공동영주인 스페인 우르헬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조공을 바쳤다. 워낙 작은 나라고 유럽의 정세구도상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 유린이나 탄압이 없어서 낡은 제도가 20세기 말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안도라는 1년씩 번갈아가며 프랑스 대통령에게 현금 960프랑(약 14만원)을, 우르헬 주교에겐 현금 460페세타(약 3,000~4,000원)와 6개의 햄, 6개의 치즈 그리고 12마리의 닭을 보냈다. 이것이 그들의 주군에게 바치는 조공이었다. 이는 1993년 입헌공동군주제가 되면서 폐지되었다.
2.2. 동아시아의 경우 [편집]
동양의 경우에는 중국의 경우 주나라 때부터 중국 영토 내 여러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신하들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제후로 삼는 책봉을 시작하였다. 제후들은 황족이나 공신들로 이루어졌으며 중앙 정부에 대한 병역과 조공이라는 세금적 의무가 있었고, 중앙 정부가 지배하는 영토 안에 존재하였으며 중앙 정부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후를 바꿀 수 있는 비독립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중앙 정부가 혼란스럽거나 무너졌을 땐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패왕을 자처하며 황제가 되려고 여러 지방 제후국들과 전쟁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 사실상 중국 영토가 아니며 중국 중앙 정부에서 친인척이거나 신하로서 책봉되거나, 파견된 제후가 아닌 독립적인 국가들이 중국 왕조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도 이와 같은 중화사상의 시스템이 작동하여 중국 왕조에선 왜국에 책봉을 내리고 명목 상의 신하로 삼았다. 즉, 주나라, 한나라 같은 중국 제국 영토 안에 있는 비독립적인 제후국들과 중국 제국 영토 밖에 있지만 독립적인 왕들이 통치하는 국가들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봉권 시스템은 화하족 또는 한족들이 주나라부터 춘추시대를 거쳐 한나라까지 중국 영토 내에 봉건 시스템적으로 중앙 정부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파견하거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책봉을 내려 그 지방을 완전히 제국 내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사실상 중앙 정부의 신하도 아니며 친인척도 아니고 제후도 아닌 다른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의 사례다. 본래 초나라는 몽몐어족 계통의 민족인 몽족이 세운 나라이며[7], 오나라와 월나라는 현대 베트남인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여서, 한족이 세운 주나라 중심의 봉건 체제에 낄 자격이 없었으나, 자기들이 직접 제후를 사칭하면서까지 주나라에 칭신해서 중화권의 정세에 개입하고자 했다[8]. 물론 이런 속보이는 짓을 주나라 측에서 인정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이들의 칭신을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도 했지만[9], 막상 이들이 너무 강대한 나라들이어서 주나라와 여러 제후국들 입장에서는 공격하기에 너무 부담되었던지라, 결국 정책을 바꾸어서 이들에게도 정식으로 제후로 책봉하고 칭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군주들을 명목 상의 신하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첫 시작이었다[10]. 아래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중국 왕조들보다도 강대한 나라들조차 일부러 칭신하고 조공을 바쳤을 만큼, 조공-책봉 체제는 결코 중국만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일례로, 18세기에 이르면서 영국조차 차 무역의 이권을 노리고 청나라 황실에 칭신한 사례가 있다. 이 시기에는 조공품으로 당대 기축통화이던 은을 바쳤는데, 은은 유럽에서도 기축통화처럼 취급되는 물건이었고, 때문에 영국 측이 청나라를 상대로 조공무역을 할 때마다, 외려 적자가 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1]. 그래서 청나라로 보내는 조공품에 은근슬쩍 아편을 끼워서 같이 조공하면서 중국 내에 아편중독자가 늘자, 거꾸로 은이 영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일어난 것이 바로 아편 전쟁이다. 조공-책봉 체제가 중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었다는 증거다.#
이는 조공-책봉 체제를 유지하는 모든 나라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초기에 일본 사신이 한양까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서까지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받아왔는데, 그 조공로가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략길로 바뀌게 되자(...), 뒷날 조선이 다시금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때, 조선 통신사들만 일본의 행정 수도인 에도까지 갈 수 있게되고, 반대로 일본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는건 금지되었다[12]. 조공을 받는 입장에서는 칭신하던 나라가 삽시간에 조공하러 오던 길로 쳐들어와서 칼을 꽂을 수도 있던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한국도 조공로를 따라서 그동안 칭신하던 나라에 칼 꽂은게 한두번이 아니다.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가 후연을 침공했을때나, 고려가 원나라를 공격해서 요동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을때도, 조공을 바치러 가면서 봐둔 길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괜히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조선이 요동 방면으로 쳐들어올까봐서 히스테리를 부린 게 아니다.
중화사상이 존재하는 중국 왕조와 교역 또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 조공 책봉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 민족들, 왜, 삼한,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형식적인 책봉을 받았다. 또한 고구려, 백제나 왜국의 왜5왕들처럼 그 책봉을 오히려 이용하여 다른 외국들에게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홍보하기도 했고, 외왕내제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북방의 몽골족 등과 같은 유목민들이 세운 독립적 국가들은 좀 다르다. 초기에는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받고 중국 문화를 습득하였으며, 명목 상 중국 왕조의 신하로서 있었다. 하지만 국력이 중국의 왕조보다 강해졌을 때는 스스로 중국 왕조에 동급이라 주장하거나 한족 정권을 오히려 책봉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속국 국가들 또는 독립 국가들을 똑같은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내렸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북방이나 다른 지역의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 한족들이 세운 국가들의 충돌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북조와 남조 등이 발생하였다. 수많은 민족들이 이 화하족들이 사용한 동아시아의 교역 문화에서 중화사상의 책봉 문화에서 우위를 얻기 위해, 또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전쟁을 하고 멸망하고 사라졌다.
삼한이나 고려, 조선, 일본의 경우에도 다른 민족 국가들과 같이 중국 밖에 존재하며 독립적인 국가이지만 중국과 교역, 무역하기 위해 중국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조공-책봉 문화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북조들이 행한 것처럼 고구려는 자신들을 천자로 자칭하였고, 여러 다른 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고려의 경우는 중국 왕조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왕내제를 행하였고, 일본의 경우에도 중국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든 말든 자국에서는 천자로 칭했으며[13] 중국과의 먼 거리로 인해 교역이 뜸할 때는 교역을 위한 조공 자체를 안 한 기간이 길다. 다만, 일본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지라, 전근대 시대 내내 동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있었기에 헤이안 시대 직전까지는 다른 나라들처럼 조공 무역에 많이 의지했다. 아스카 시대 전후에 백제나 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이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견수사, 견당사를 중국에 파견한 것이 그 예였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것은 이런 조공 책봉 체제의 결과물인데, 원래 쓰던 왜라는 국호가 한 글자 국호라는 점이 문제가 된 바람에 같은 뜻의 두 글자 국호로 바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한 글자 국호는 중국의 정통 왕조로 대접받는 나라 내지는, 중원에 소재한 나라들만 사용하는 게 암묵의 룰이었던지라[14], 당시로서는 아시아 변방의 듣보잡 국가 대접받던 일본이 한 글자 국호를 쓰는 건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15].
야심이 있다면 형식상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고구려나 신라, 고려에서도 외왕내제를 행하고 북조 등이 송나라와 결판을 내려고 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역을 위해 입조나 조공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서하. 서하의 경우는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공격받을 때 덩달아 공격하면서 황제국을 자칭하려고 했다. 다만 송나라 측에서도 황제국 칭호만큼은 용납하지 않아서 그때마다 대대적으로 격퇴하거나 역으로 공격을 했다. 결국 요나라와 협상을 맺게 되면서 서하와 송이 1:1의 상황이 되자 서하에서도 칭신하고 막대한 양의 세폐를 선물을 받는 것으로 외왕내제의 선에서 그쳤다. 그래도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공격하고 황제국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 사실상 중국 영토가 아니며 중국 중앙 정부에서 친인척이거나 신하로서 책봉되거나, 파견된 제후가 아닌 독립적인 국가들이 중국 왕조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도 이와 같은 중화사상의 시스템이 작동하여 중국 왕조에선 왜국에 책봉을 내리고 명목 상의 신하로 삼았다. 즉, 주나라, 한나라 같은 중국 제국 영토 안에 있는 비독립적인 제후국들과 중국 제국 영토 밖에 있지만 독립적인 왕들이 통치하는 국가들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봉권 시스템은 화하족 또는 한족들이 주나라부터 춘추시대를 거쳐 한나라까지 중국 영토 내에 봉건 시스템적으로 중앙 정부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파견하거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책봉을 내려 그 지방을 완전히 제국 내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사실상 중앙 정부의 신하도 아니며 친인척도 아니고 제후도 아닌 다른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의 사례다. 본래 초나라는 몽몐어족 계통의 민족인 몽족이 세운 나라이며[7], 오나라와 월나라는 현대 베트남인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여서, 한족이 세운 주나라 중심의 봉건 체제에 낄 자격이 없었으나, 자기들이 직접 제후를 사칭하면서까지 주나라에 칭신해서 중화권의 정세에 개입하고자 했다[8]. 물론 이런 속보이는 짓을 주나라 측에서 인정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이들의 칭신을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한 초나라를 정벌하려고도 했지만[9], 막상 이들이 너무 강대한 나라들이어서 주나라와 여러 제후국들 입장에서는 공격하기에 너무 부담되었던지라, 결국 정책을 바꾸어서 이들에게도 정식으로 제후로 책봉하고 칭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군주들을 명목 상의 신하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첫 시작이었다[10]. 아래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중국 왕조들보다도 강대한 나라들조차 일부러 칭신하고 조공을 바쳤을 만큼, 조공-책봉 체제는 결코 중국만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일례로, 18세기에 이르면서 영국조차 차 무역의 이권을 노리고 청나라 황실에 칭신한 사례가 있다. 이 시기에는 조공품으로 당대 기축통화이던 은을 바쳤는데, 은은 유럽에서도 기축통화처럼 취급되는 물건이었고, 때문에 영국 측이 청나라를 상대로 조공무역을 할 때마다, 외려 적자가 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11]. 그래서 청나라로 보내는 조공품에 은근슬쩍 아편을 끼워서 같이 조공하면서 중국 내에 아편중독자가 늘자, 거꾸로 은이 영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일어난 것이 바로 아편 전쟁이다. 조공-책봉 체제가 중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었다는 증거다.#
이는 조공-책봉 체제를 유지하는 모든 나라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초기에 일본 사신이 한양까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서까지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받아왔는데, 그 조공로가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략길로 바뀌게 되자(...), 뒷날 조선이 다시금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때, 조선 통신사들만 일본의 행정 수도인 에도까지 갈 수 있게되고, 반대로 일본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는건 금지되었다[12]. 조공을 받는 입장에서는 칭신하던 나라가 삽시간에 조공하러 오던 길로 쳐들어와서 칼을 꽂을 수도 있던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한국도 조공로를 따라서 그동안 칭신하던 나라에 칼 꽂은게 한두번이 아니다.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가 후연을 침공했을때나, 고려가 원나라를 공격해서 요동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을때도, 조공을 바치러 가면서 봐둔 길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괜히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조선이 요동 방면으로 쳐들어올까봐서 히스테리를 부린 게 아니다.
중화사상이 존재하는 중국 왕조와 교역 또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 조공 책봉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 민족들, 왜, 삼한,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형식적인 책봉을 받았다. 또한 고구려, 백제나 왜국의 왜5왕들처럼 그 책봉을 오히려 이용하여 다른 외국들에게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홍보하기도 했고, 외왕내제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북방의 몽골족 등과 같은 유목민들이 세운 독립적 국가들은 좀 다르다. 초기에는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받고 중국 문화를 습득하였으며, 명목 상 중국 왕조의 신하로서 있었다. 하지만 국력이 중국의 왕조보다 강해졌을 때는 스스로 중국 왕조에 동급이라 주장하거나 한족 정권을 오히려 책봉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속국 국가들 또는 독립 국가들을 똑같은 중화사상 시스템으로 책봉을 내렸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북방이나 다른 지역의 독립적인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 한족들이 세운 국가들의 충돌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북조와 남조 등이 발생하였다. 수많은 민족들이 이 화하족들이 사용한 동아시아의 교역 문화에서 중화사상의 책봉 문화에서 우위를 얻기 위해, 또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전쟁을 하고 멸망하고 사라졌다.
삼한이나 고려, 조선, 일본의 경우에도 다른 민족 국가들과 같이 중국 밖에 존재하며 독립적인 국가이지만 중국과 교역, 무역하기 위해 중국 문화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조공-책봉 문화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북조들이 행한 것처럼 고구려는 자신들을 천자로 자칭하였고, 여러 다른 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고려의 경우는 중국 왕조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왕내제를 행하였고, 일본의 경우에도 중국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든 말든 자국에서는 천자로 칭했으며[13] 중국과의 먼 거리로 인해 교역이 뜸할 때는 교역을 위한 조공 자체를 안 한 기간이 길다. 다만, 일본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지라, 전근대 시대 내내 동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있었기에 헤이안 시대 직전까지는 다른 나라들처럼 조공 무역에 많이 의지했다. 아스카 시대 전후에 백제나 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이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 견수사, 견당사를 중국에 파견한 것이 그 예였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것은 이런 조공 책봉 체제의 결과물인데, 원래 쓰던 왜라는 국호가 한 글자 국호라는 점이 문제가 된 바람에 같은 뜻의 두 글자 국호로 바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한 글자 국호는 중국의 정통 왕조로 대접받는 나라 내지는, 중원에 소재한 나라들만 사용하는 게 암묵의 룰이었던지라[14], 당시로서는 아시아 변방의 듣보잡 국가 대접받던 일본이 한 글자 국호를 쓰는 건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15].
야심이 있다면 형식상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라 고구려나 신라, 고려에서도 외왕내제를 행하고 북조 등이 송나라와 결판을 내려고 한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역을 위해 입조나 조공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서하. 서하의 경우는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공격받을 때 덩달아 공격하면서 황제국을 자칭하려고 했다. 다만 송나라 측에서도 황제국 칭호만큼은 용납하지 않아서 그때마다 대대적으로 격퇴하거나 역으로 공격을 했다. 결국 요나라와 협상을 맺게 되면서 서하와 송이 1:1의 상황이 되자 서하에서도 칭신하고 막대한 양의 세폐를 선물을 받는 것으로 외왕내제의 선에서 그쳤다. 그래도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공격하고 황제국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3. 사례 [편집]
3.1. 해외의 사례 [편집]
오이라트의 경우,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가격을 마음대로 부풀리기도 했다. 여기서 '가격'이라는 것은 말 한 마리당 '하사'하는 은의 분량을 의미한다. 사실 가격 자체는 고정되어 있었지만, 오이라트 측에서는 말의 숫자를 실제로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다르게 멋대로 부풀려서 몇 배의 은을 받아냈다. 실제로 과거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 상부가 제대로 된 내용을 알기 쉽지 않으니 어떻게든 속일 방법이야 있었고 여러 국가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이 조공무역을 '막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가 천황가의 세력과 다이묘 세력들아 개별적으로 다른 나라와 무역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무로마치 막부 밑의 6대 가문들이 몰래 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센고쿠 시대가 도래한다.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많이 의존해왔다. 땅도 좁고, 농사도 잘 안 되다보니 그렇게 된 것.
만주족은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전 세계를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한족들에게 선전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이 조공무역을 '막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가 천황가의 세력과 다이묘 세력들아 개별적으로 다른 나라와 무역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무로마치 막부 밑의 6대 가문들이 몰래 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센고쿠 시대가 도래한다.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은 경제적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많이 의존해왔다. 땅도 좁고, 농사도 잘 안 되다보니 그렇게 된 것.
만주족은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전 세계를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한족들에게 선전했다.
3.2. 일본의 사례 [편집]
3.2.1. 일본의 고려에 대한 조공 [편집]
11세기 중엽 고려와 일본 간에는 북큐슈와 금주(김해)를 오가는 무역로가 있었다. 고려에 도항하는 일본인들 중에는 상인 이외에 일본국사, 대마도주, 살마주사 등 토산물을 헌상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무역은 명목상 지방관에 의한 고려에의 ‘조공’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문종대인 11세기 후반부터 큐슈 각지의 지방관과 민간상인들이 고려에 도항하여 ‘방물(方物)’을 바쳤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였다.
일본에서 내왕하는 선박을 일본인들이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물품을 바친다는 뜻으로 진봉이란 용어사용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일본인이 물품을 진봉하는 항례적인 법규가 제정되었다.
때로는 고려에서 주는 사급품을 노리고 일본인들이 진봉하기 위하여 상호간에 경쟁이 심하여 서로 싸우는 폐단까지 생겨 고려에서는 진봉 그자체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은 경향을 보였다. 이같은 경향은 일정 기간내에 일본상선을 출입선수 횟수에 대하여까지 제한을 두었다.
특히 문종대인 11세기 후반부터 큐슈 각지의 지방관과 민간상인들이 고려에 도항하여 ‘방물(方物)’을 바쳤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였다.
일본에서 내왕하는 선박을 일본인들이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물품을 바친다는 뜻으로 진봉이란 용어사용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일본인이 물품을 진봉하는 항례적인 법규가 제정되었다.
때로는 고려에서 주는 사급품을 노리고 일본인들이 진봉하기 위하여 상호간에 경쟁이 심하여 서로 싸우는 폐단까지 생겨 고려에서는 진봉 그자체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은 경향을 보였다. 이같은 경향은 일정 기간내에 일본상선을 출입선수 횟수에 대하여까지 제한을 두었다.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일본의 조공 내역》 】
【1056년 문종 10년 10월 日本國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문종 27년 7월 日本國人 왕칙등 42인 나전 외에 12가지 물건을 진상
문종 27년 7월 일기도(규슈 나가사끼)구당관 등정안국 등 33인 방물을 진상
문종 27년 11월 日本國 에서 예물과 명마를 헌상
문종 28년 2월 日本國 선두 중리 등 39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4월 日本國 오옹에 등 18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6월 日本人 조원. 시경등 12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7월 日本國 상인 59인 고려에 도착
문종 30년 10월 日本國 승속(승려와속인) 25인 불상을 헌상
문종 33년 11월 日本國 신통 등 소라.해조 등을 흥왕사에 진상
문종 34년 9월 日本國 축전주에서, 방물을 헌상, 살마주(가고시마)에 사신을 보내와 헌상
문종 36년 11월 대마도에서, 방물을 헌상
1084년 선종 원년 6월 日本國 축전도의 후지와라,,수은을 헌상
선종 2년 2월 대마도주 구당관, 감귤을 진상
선종 3년 3월 대마도주 구당관, 방물을 진상
선종 4년 3월 日本 상인 중원.친종 등 32인 특산물 진상
선종 4년 7월 대마도의 원평 등 48인 수은.진주.보도.우마 등을 헌상
선종 6년 8월 다자이후의 상인, 수은.진주.궁전.도검 등을 진상
예종 11년 2월 日本國에서 감자[16]를 진상
고려사(高麗史)】
문종 27년 7월 日本國人 왕칙등 42인 나전 외에 12가지 물건을 진상
문종 27년 7월 일기도(규슈 나가사끼)구당관 등정안국 등 33인 방물을 진상
문종 27년 11월 日本國 에서 예물과 명마를 헌상
문종 28년 2월 日本國 선두 중리 등 39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4월 日本國 오옹에 등 18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6월 日本人 조원. 시경등 12인 특산물을 진상
문종 29년 7월 日本國 상인 59인 고려에 도착
문종 30년 10월 日本國 승속(승려와속인) 25인 불상을 헌상
문종 33년 11월 日本國 신통 등 소라.해조 등을 흥왕사에 진상
문종 34년 9월 日本國 축전주에서, 방물을 헌상, 살마주(가고시마)에 사신을 보내와 헌상
문종 36년 11월 대마도에서, 방물을 헌상
1084년 선종 원년 6월 日本國 축전도의 후지와라,,수은을 헌상
선종 2년 2월 대마도주 구당관, 감귤을 진상
선종 3년 3월 대마도주 구당관, 방물을 진상
선종 4년 3월 日本 상인 중원.친종 등 32인 특산물 진상
선종 4년 7월 대마도의 원평 등 48인 수은.진주.보도.우마 등을 헌상
선종 6년 8월 다자이후의 상인, 수은.진주.궁전.도검 등을 진상
예종 11년 2월 日本國에서 감자[16]를 진상
고려사(高麗史)】
3.2.2. 일본의 조선에 대한 조공 [편집]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의 다이묘들과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선에 조공한 내역과 함께 보낸 서한의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다이묘들과 막부의 쇼군들은 조공서한에서 조선을 상국(上國) 또는 대방(大邦)이라 높여불렀고 자신들은 누방(陋邦)으로 낮추어 칭했다. 이 중에 일부는 스스로 백제 왕족의 후손임을 자칭하며 '조상님의 나라'인 조선과 교역하길 간절히 원했다. 간간히 백제 왕릉에 참배하러 자주 방문하는 오우치씨 같은 일본의 교역권을 관리하던 큰 세력들이었다. 일본 다이묘들이 조선 군주를 '황제폐하'로 부른 사례도 여려차례 발견되는데, 조선이 자체적으로 황제라는 직함을 두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 군주를 황제로, 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부를 만큼, 당시 조선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측 다이묘들의 기나긴 대조선 조공목록에 실리적 목적의 조공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할 건 없다. 왜냐하면 사실 일본의 조선 조공의 실상은 일본에서 남북조시대나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몇몇 다이묘들이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의 쇼군이나, 조정의 천황도 씹고선 중국의 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17] 단, 기록상 당시 일본의 막부였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직접 막부 차원에서 조선에 조공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실리적인 목적의 조공은 다이묘들이 아닌 일본 막부 또한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조선시대에 일본 사절들이 이러한 혜택을 노리고 너무 자주 와서 조선에서 이들을 못 오게 할 방안을 고심해야 할 정도 였다. 달랑 칼 한 자루 바치고 푸지게 얻어먹고 돈까지 받아 돌아가니 너도 나도 오려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일본인은 큐슈왕국의 외교사절을 가장해 조선 정부가 접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조선 입장에서는 열악한 통신 사정으로 인해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어 대접해줄 수 밖에 없었다. 대마도 같은 경우 농사도 잘 안되고 살기 팍팍한데 조선에 가면 이렇게 접대를 해주니 이게 너무 좋아서 아예 조선에 영토를 바치고 속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려 하기도 했다. 가끔씩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이 이야기를 주워듣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조선이나 명나라에서는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는 소위 ‘천황’이 아닌 쇼군(막부의 수장)이 일본의 실력자이고, 대외적인 국가대표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측 다이묘들의 기나긴 대조선 조공목록에 실리적 목적의 조공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할 건 없다. 왜냐하면 사실 일본의 조선 조공의 실상은 일본에서 남북조시대나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몇몇 다이묘들이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쌩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의 쇼군이나, 조정의 천황도 씹고선 중국의 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17] 단, 기록상 당시 일본의 막부였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직접 막부 차원에서 조선에 조공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실리적인 목적의 조공은 다이묘들이 아닌 일본 막부 또한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조선시대에 일본 사절들이 이러한 혜택을 노리고 너무 자주 와서 조선에서 이들을 못 오게 할 방안을 고심해야 할 정도 였다. 달랑 칼 한 자루 바치고 푸지게 얻어먹고 돈까지 받아 돌아가니 너도 나도 오려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일본인은 큐슈왕국의 외교사절을 가장해 조선 정부가 접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조선 입장에서는 열악한 통신 사정으로 인해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어 대접해줄 수 밖에 없었다. 대마도 같은 경우 농사도 잘 안되고 살기 팍팍한데 조선에 가면 이렇게 접대를 해주니 이게 너무 좋아서 아예 조선에 영토를 바치고 속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려 하기도 했다. 가끔씩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이 이야기를 주워듣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조선이나 명나라에서는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는 소위 ‘천황’이 아닌 쇼군(막부의 수장)이 일본의 실력자이고, 대외적인 국가대표기관이었다.
【일본의 대조선 조공 기사 목록】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6179)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6180) 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6181) 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6182) 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폐하(陛下) : 세조를 말함
*대방(大邦) :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누방(陋邦) :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금상 황제(今上皇帝) : 성종(成宗)을 말함
*위궐(魏闕) : 임금의 궁궐
*단성(丹誠) :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하정(下情) : 윗사람에게 대하여 자기의 마음이나 뜻을 낮추어 이르는 말
*봉지(封紙) : 제후의 영토(봉토).
◈성종 4년 계사(1473, 성화 9)
177
일본국의 다다량정홍이 보낸 원주덕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재물을 하사하다
신숙주(申叔舟)를 시켜서 원주덕(源周德)에게 말하기를,
“너희 대내전(大內殿)은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갔으므로 서로 교호(交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편안하다고 하니 기쁘고 위로되나, 다만 너희 나라 전쟁이 어떠하냐?”
하니 원주덕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연(那衍)은 특별히 성상의 은덕을 입어 무양(無恙)합니다. 본국은 전란이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국(上國)에 오래 통신(通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될 기한이 없어서 특별히 신(臣)을 보내어 성심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 33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 다다량정홍이 원주덕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원주덕(源周德)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상국(上國)에 조공(朝貢)하고 돌아온 자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축하하며 말하기를, ‘폐하의 용봉(龍鳳)과 같은 자태는 천일(天日)의 표상이라 성스러운 덕이 계속 일고, 인자한 교화(敎化)가 바야흐로 풍성하여 역시 중흥(中興)을 선광(宣光)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누군들 서쪽을 향해 기꺼워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성종 45권, 5년( 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가 사람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 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4246) 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4247) 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4248) 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황제 폐하(皇帝陛下) : 조선 국왕(성종)을 가리킴.
*상국(上國) : 조선을 가리킴
*존명(尊命) : 일본 국왕의 명을 가리킴.
*임진년(壬辰年) : 1472년 (성종 3년)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7월 30일(기사) 1번째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또 토물(土物)을 바쳤다. 일본 국왕은 원도의(源道義)였다. 일본국 방장 자사(防長刺史) 대내다다량성견(大內多多良盛見)도 또한 예물을 바쳤다.
▶ 원도의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대외적으로 사신을 보낼 때 쓰던 이름
◈태종 6년 병술(1406, 영락 4)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 원도의(源道義)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하였고,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치고 부로(?虜)를 돌려보냈다.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1백 35인이 대궐에 나아가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예를 받은 뒤에, 규주와 범령은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구준은 대궐 밖에 있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자판은 조종조로부터 서로 전하는 것이 다만 1본뿐이다. 만약 겹쳐서 여러벌 있다면 국왕에 대하여 굳이 아끼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자상하시니 깊이 감사하고 깊이 감사하옵니다. 신들도 또한 잘 헤아려서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이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는 일본의 조공 기록들》
태조 2년 계유(1393) 6월 16일(경인) 일본 일기도의 중 건철이 포로 200여 인을 돌려보내고 방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일(임진)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중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1일(임인)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6일(정미) 일본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12월 16일(을사)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6월 21일(신축)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0월 1일(기묘)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1월 14일(임술) 일본 육주목 의홍이 중 영범·영확 편에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7년 무인(1398) 7월 27일(경자) 일본 비전주 준주 태수 원경이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9월 10일(정축) 이달에 일본국의 절 주지가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11월 1일(정묘) 일본 서해도 준주 태수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정종 2년 경진(1400) 8월 1일(계사)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6월 18일(을해) 일본국 비주 태수가 말과 약재를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9월 29일(을묘)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태종 2년 임오(1402) 9월 29일(기유) 일본 살주 산성의 태수 원뇌수와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2월 27일(갑술) 일본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월 23일(신축) 일본에서 사신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0월 8일(임자) 일본 사자가 잡혀 갔던 우리 나라 사람을 데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30일(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17일(병진) 일본 전평전 원원규가 토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29일(계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도적을 잡은 것을 보고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3일(정묘) 일본 지좌전이 중 도군 등을 보내 약재 등의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5월 24일(무오) 일본에서 예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12월 21일(병오) 일본 단주 수와 비주 수가 사신을 보내 소목 등의 물품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8월 6일(임진) 일본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포로 76명을 소환하고 종정무도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22일(임오) 일본 호자전 객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16일(병자) 일본 서해도 단주 태수 원영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2월 27일(무자)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0월 26일(병오) 일본 살마주 등원뇌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1월 26일(병자) 일본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5월 6일(기미) 일본 지좌전, 호자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7월 21일(임신) 일본국 대내 다다량 덕웅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8월 5일(병술) 일본 전평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2월 1일(병술) 일본 살마주 태수가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2월 27일(병오) 일본 진서탐제장군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6월 3일(경진) 일본의 지좌전·어주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0월 28일(임인) 일본 국왕 원도의가 좀도적을 금지시켰다고 알리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4월 19일(정유) 일본 구사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6일(임자) 일본의 대내전이 옥교자·병풍·약재·기명·능견 등의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20일(병인) 일본 살마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8월 21일 (병,신) 일본국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9월 29일(갑술) 일본의 축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2월 6일(기묘) 일본 구주 목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월 26일(을해) 일본의 원만직이 예물과, 불로원이라는 약 1백 개를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6일(기유) 일본의 지좌전이 사람을 보내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일기주와 비주전에서 진위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11월 8일(병자) 일본 축전주 객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9월 6일(을해)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윤 4월 11일(계축) 일본의 대내전 다다량덕웅이 중 주정을 보내 토산물과 관음화상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하송포의 삼하 수 융군이 예물을 바치다
<중략>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4일(경인) 일본 일향주 태수가 표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고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29일(을사) 일본 비전주 중·일향주 태수·관서도 축전주 석성 관부가 칼·향 등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30일(병오) 일본 관서로 구주 도원수 원도진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1월 29일(을해) 일본 서해로 미작 태수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6일(신사) 일본 대마도 종정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3일(기축) 일본 구주 총수와 서해로 미작 태수가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8월 21일(무술) 일본 서해도 일향주 태수와 대마주 조율 산성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29일(갑진) 일본 축전주 태수가 소목 백반 등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1월 3일(무신) 일본 대마도 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3월 7일(신해) 일본 구주 도원수가 《대반야경》을 청구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4월 4일(무인) 일본국 비주 태수·장주 태수·대마도 화전포 도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28일(정유) 일본 구주 총관 평종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2일 (병,신) 일본 방장풍삼주 도호 다다량만세가 공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8일(임진) 일본 비주 태수 원창청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5일(기축)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공물과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0월 26일(신유) 일본국 구주 절도사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9일(을사) 일본 전 서해도 구주 도원수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월 5일(갑진) 일본국 경도·구주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2일(무술) 일본 서해도 비전주 평우진 준주목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8일(임인)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9일(계묘)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3년 신축(1421) 9월 9일(기사) 일본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5일(경신) 일본인 삼주 태수와 대마도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7일(갑신) 일본국 대마주의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2월 26일(계축) 일본의 원의준·등원뢰·원성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윤 12월 23일(병자) 일본 구주 총관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3일(무인) 일본 도영·평만경·웅수·평민소조천·입도상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2일(정축) 일본국 대내다다량도웅·원도진·원의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6일(계미)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전 구주 총관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8일(을축) 일본국 구주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25일(임신) 일본국 원의준·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1월 24일(신축) 일본국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5월 19일(무술) 일본국 관서도 원준신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월 12일(갑오)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2월 25일(임신)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5일(임술) 일본 구주 다다량덕웅·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14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29일(신미) 일본국 상송포 구사도의 등원의영과 이세수 원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일(임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9일(경술) 일본국 관제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0일(임진) 일본국 일기주 왜 호군 등구랑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22일(을축) 일본국 비전주 상송포의 지좌원씨의 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8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왜 호군 정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7일(경신) 일본국 등원의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2일(계축) 일본국 비전주 전평우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27일(무술) 일본국 일기수 원고와 이세수 원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3일(갑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6일(정축)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과 비전주 상송포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8일(경술) 일본국 관서로 축전주 냉천가무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9일(신축)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일(갑술)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16일(경신) 일본국 대마도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1일(을축) 일본국의 원지직·상송포의 중 원우·대마주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9일(계유) 일본국 상송포 파다도의 원납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일(병자) 일본국 대마주의 종성직·종성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21일(갑오) 일본국 원고·원영과 대마주 종성직·종성홍·종호웅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0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화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5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일(갑술) 일본국 비전주 종상군 지수 종상조신씨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3일(병오)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비전주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1일(갑신) 일본국 등원조신교뢰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7월 28일(을미) 일본국 비전주의 진궁 병부 소보 원영이 사자를 보내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6일(갑자) 일본국 대마주 종성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일(경자) 일본국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5월 24일(임진) 일본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4월 22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호군 정대랑의 아들 사정 정가문수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성종 즉위년 기축(1469) 12월 8일(정사) 일본국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월 25일(갑진) 일본국 대마주의 종정국·종정수와 인위군의 종성가와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4월 5일(계축) 일본국 축전주 종상군 지수 씨향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1일(무진) 일본국의 원승·종언팔랑무세·등희구·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원만·등씨의 어미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27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좌근장감화겸과 귀해지국의 교공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4일(기사)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24일(무진) 일본국 관서도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18일(신유) 일본국과 올적합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27일(경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3일(기축) 일본국 주방주 산구 소사 대삼하수 원홍안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3월 12일(신묘) 일본국 일기주 수호 대관 진궁 병부 소보 원무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3일(경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종조육성준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6일(임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홍·종무차·원승·원중실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8일(신해)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1월 1일(을해) 일본국 구주 시소의 종언팔랑무세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8일(임자) 일본국 풍주 태수 대우팔랑사능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28일(계묘)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19일(갑오) 일본국에서 서계와 함께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8일(계유) 일본국 세천 좌오두 지현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5일(경오)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3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7일(임자) 일본국 여러 태수들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 경성 관령 전산전 좌경 대부 원의승이 중 향양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2일(무자) 일본국 종정국·종정수·종성홍·종성가·원덕 등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2월 28일(신미)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5월 22일(갑오) 일본국 비전주 원덕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11일(임자) 일본국 장문주 적간관진수 충수가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27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의 조공기록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6179)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6180) 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6181) 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6182) 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폐하(陛下) : 세조를 말함
*대방(大邦) :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누방(陋邦) :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9년 계미(1463, 천순 7)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상국(上國) : 조선(朝鮮)을 말함
*금상 황제(今上皇帝) : 성종(成宗)을 말함
*위궐(魏闕) : 임금의 궁궐
*단성(丹誠) :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하정(下情) : 윗사람에게 대하여 자기의 마음이나 뜻을 낮추어 이르는 말
*봉지(封紙) : 제후의 영토(봉토).
◈성종 4년 계사(1473, 성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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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다다량정홍이 보낸 원주덕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재물을 하사하다
신숙주(申叔舟)를 시켜서 원주덕(源周德)에게 말하기를,
“너희 대내전(大內殿)은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갔으므로 서로 교호(交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편안하다고 하니 기쁘고 위로되나, 다만 너희 나라 전쟁이 어떠하냐?”
하니 원주덕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연(那衍)은 특별히 성상의 은덕을 입어 무양(無恙)합니다. 본국은 전란이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국(上國)에 오래 통신(通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될 기한이 없어서 특별히 신(臣)을 보내어 성심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 33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 다다량정홍이 원주덕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원주덕(源周德)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상국(上國)에 조공(朝貢)하고 돌아온 자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축하하며 말하기를, ‘폐하의 용봉(龍鳳)과 같은 자태는 천일(天日)의 표상이라 성스러운 덕이 계속 일고, 인자한 교화(敎化)가 바야흐로 풍성하여 역시 중흥(中興)을 선광(宣光)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누군들 서쪽을 향해 기꺼워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성종 45권, 5년( 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가 사람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 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4246) 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4247) 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4248) 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황제 폐하(皇帝陛下) : 조선 국왕(성종)을 가리킴.
*상국(上國) : 조선을 가리킴
*존명(尊命) : 일본 국왕의 명을 가리킴.
*임진년(壬辰年) : 1472년 (성종 3년)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7월 30일(기사) 1번째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또 토물(土物)을 바쳤다. 일본 국왕은 원도의(源道義)였다. 일본국 방장 자사(防長刺史) 대내다다량성견(大內多多良盛見)도 또한 예물을 바쳤다.
▶ 원도의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대외적으로 사신을 보낼 때 쓰던 이름
◈태종 6년 병술(1406, 영락 4)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 원도의(源道義)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하였고,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치고 부로(?虜)를 돌려보냈다.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1백 35인이 대궐에 나아가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예를 받은 뒤에, 규주와 범령은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구준은 대궐 밖에 있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자판은 조종조로부터 서로 전하는 것이 다만 1본뿐이다. 만약 겹쳐서 여러벌 있다면 국왕에 대하여 굳이 아끼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니, 규주 등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자상하시니 깊이 감사하고 깊이 감사하옵니다. 신들도 또한 잘 헤아려서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이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는 일본의 조공 기록들》
태조 2년 계유(1393) 6월 16일(경인) 일본 일기도의 중 건철이 포로 200여 인을 돌려보내고 방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일(임진)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중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1일(임인)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6일(정미) 일본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12월 16일(을사)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6월 21일(신축)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0월 1일(기묘)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1월 14일(임술) 일본 육주목 의홍이 중 영범·영확 편에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7년 무인(1398) 7월 27일(경자) 일본 비전주 준주 태수 원경이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9월 10일(정축) 이달에 일본국의 절 주지가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11월 1일(정묘) 일본 서해도 준주 태수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정종 2년 경진(1400) 8월 1일(계사)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6월 18일(을해) 일본국 비주 태수가 말과 약재를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9월 29일(을묘)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태종 2년 임오(1402) 9월 29일(기유) 일본 살주 산성의 태수 원뇌수와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2월 27일(갑술) 일본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월 23일(신축) 일본에서 사신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0월 8일(임자) 일본 사자가 잡혀 갔던 우리 나라 사람을 데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30일(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17일(병진) 일본 전평전 원원규가 토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29일(계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도적을 잡은 것을 보고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3일(정묘) 일본 지좌전이 중 도군 등을 보내 약재 등의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5월 24일(무오) 일본에서 예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12월 21일(병오) 일본 단주 수와 비주 수가 사신을 보내 소목 등의 물품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8월 6일(임진) 일본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포로 76명을 소환하고 종정무도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22일(임오) 일본 호자전 객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16일(병자) 일본 서해도 단주 태수 원영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2월 27일(무자)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0월 26일(병오) 일본 살마주 등원뇌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1월 26일(병자) 일본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5월 6일(기미) 일본 지좌전, 호자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7월 21일(임신) 일본국 대내 다다량 덕웅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8월 5일(병술) 일본 전평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2월 1일(병술) 일본 살마주 태수가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2월 27일(병오) 일본 진서탐제장군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6월 3일(경진) 일본의 지좌전·어주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0월 28일(임인) 일본 국왕 원도의가 좀도적을 금지시켰다고 알리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4월 19일(정유) 일본 구사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6일(임자) 일본의 대내전이 옥교자·병풍·약재·기명·능견 등의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20일(병인) 일본 살마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8월 21일 (병,신) 일본국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9월 29일(갑술) 일본의 축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2월 6일(기묘) 일본 구주 목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월 26일(을해) 일본의 원만직이 예물과, 불로원이라는 약 1백 개를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6일(기유) 일본의 지좌전이 사람을 보내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일기주와 비주전에서 진위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11월 8일(병자) 일본 축전주 객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9월 6일(을해)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윤 4월 11일(계축) 일본의 대내전 다다량덕웅이 중 주정을 보내 토산물과 관음화상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하송포의 삼하 수 융군이 예물을 바치다
<중략>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4일(경인) 일본 일향주 태수가 표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고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29일(을사) 일본 비전주 중·일향주 태수·관서도 축전주 석성 관부가 칼·향 등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30일(병오) 일본 관서로 구주 도원수 원도진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1월 29일(을해) 일본 서해로 미작 태수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6일(신사) 일본 대마도 종정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3일(기축) 일본 구주 총수와 서해로 미작 태수가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8월 21일(무술) 일본 서해도 일향주 태수와 대마주 조율 산성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29일(갑진) 일본 축전주 태수가 소목 백반 등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1월 3일(무신) 일본 대마도 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3월 7일(신해) 일본 구주 도원수가 《대반야경》을 청구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4월 4일(무인) 일본국 비주 태수·장주 태수·대마도 화전포 도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28일(정유) 일본 구주 총관 평종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2일 (병,신) 일본 방장풍삼주 도호 다다량만세가 공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8일(임진) 일본 비주 태수 원창청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5일(기축)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공물과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0월 26일(신유) 일본국 구주 절도사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9일(을사) 일본 전 서해도 구주 도원수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월 5일(갑진) 일본국 경도·구주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2일(무술) 일본 서해도 비전주 평우진 준주목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8일(임인)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9일(계묘)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3년 신축(1421) 9월 9일(기사) 일본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5일(경신) 일본인 삼주 태수와 대마도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7일(갑신) 일본국 대마주의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2월 26일(계축) 일본의 원의준·등원뢰·원성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윤 12월 23일(병자) 일본 구주 총관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3일(무인) 일본 도영·평만경·웅수·평민소조천·입도상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2일(정축) 일본국 대내다다량도웅·원도진·원의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6일(계미)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전 구주 총관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8일(을축) 일본국 구주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25일(임신) 일본국 원의준·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1월 24일(신축) 일본국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5월 19일(무술) 일본국 관서도 원준신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월 12일(갑오)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2월 25일(임신)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5일(임술) 일본 구주 다다량덕웅·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14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29일(신미) 일본국 상송포 구사도의 등원의영과 이세수 원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일(임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9일(경술) 일본국 관제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0일(임진) 일본국 일기주 왜 호군 등구랑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22일(을축) 일본국 비전주 상송포의 지좌원씨의 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8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왜 호군 정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7일(경신) 일본국 등원의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2일(계축) 일본국 비전주 전평우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27일(무술) 일본국 일기수 원고와 이세수 원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3일(갑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6일(정축)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과 비전주 상송포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8일(경술) 일본국 관서로 축전주 냉천가무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9일(신축)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일(갑술)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16일(경신) 일본국 대마도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1일(을축) 일본국의 원지직·상송포의 중 원우·대마주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9일(계유) 일본국 상송포 파다도의 원납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일(병자) 일본국 대마주의 종성직·종성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21일(갑오) 일본국 원고·원영과 대마주 종성직·종성홍·종호웅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0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화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5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일(갑술) 일본국 비전주 종상군 지수 종상조신씨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3일(병오)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비전주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1일(갑신) 일본국 등원조신교뢰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7월 28일(을미) 일본국 비전주의 진궁 병부 소보 원영이 사자를 보내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6일(갑자) 일본국 대마주 종성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일(경자) 일본국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5월 24일(임진) 일본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4월 22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호군 정대랑의 아들 사정 정가문수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성종 즉위년 기축(1469) 12월 8일(정사) 일본국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월 25일(갑진) 일본국 대마주의 종정국·종정수와 인위군의 종성가와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4월 5일(계축) 일본국 축전주 종상군 지수 씨향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1일(무진) 일본국의 원승·종언팔랑무세·등희구·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원만·등씨의 어미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27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좌근장감화겸과 귀해지국의 교공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4일(기사)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24일(무진) 일본국 관서도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18일(신유) 일본국과 올적합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27일(경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3일(기축) 일본국 주방주 산구 소사 대삼하수 원홍안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3월 12일(신묘) 일본국 일기주 수호 대관 진궁 병부 소보 원무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3일(경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종조육성준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6일(임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홍·종무차·원승·원중실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8일(신해)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1월 1일(을해) 일본국 구주 시소의 종언팔랑무세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8일(임자) 일본국 풍주 태수 대우팔랑사능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28일(계묘)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19일(갑오) 일본국에서 서계와 함께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8일(계유) 일본국 세천 좌오두 지현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5일(경오)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3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7일(임자) 일본국 여러 태수들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 경성 관령 전산전 좌경 대부 원의승이 중 향양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2일(무자) 일본국 종정국·종정수·종성홍·종성가·원덕 등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2월 28일(신미)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5월 22일(갑오) 일본국 비전주 원덕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11일(임자) 일본국 장문주 적간관진수 충수가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27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의 조공기록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
3.3. 한반도의 사례 [편집]
3.3.1. 고려의 사례 [편집]
고려 전기의 조공은 사실상 비정기적인 선물을 주고 받는 형태였기 때문에 의례상 군신관계를 수립한 뒤에도 명목상의 상국으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거나 조공으로 인해 경제적인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전무했지만 원종이 쿠빌라이 칸에게 입조하여 칭신한 이후로는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됨에 따라 고려 전기까지의 조공책봉 관계와 달리 원 간섭기 이후로는 강력한 속국관계가 구축되고 이로인하여 내정간섭과 조공으로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로 이는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원나라 황제)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고려 국내의 정치, 의례에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정간섭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원 복속기에 들어 몽골 황제권이 고려 내정의 최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제로 권력 행사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였고, 고려국왕이 황제권으로부터 체포, 심문, 유배, 폐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충선왕과 충혜왕의 사례가 있다.)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 또한 제후국제로 격하됐으며 더나아가 정동행성을 매개로 각종 외로 아문 의례가 고려에 적용되었다.[18]
아래의 내용은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가 고려에 최소한의 외왕내제적인 모습들 마저도 완전히 금지한다고 통보한 글이다. 이는 고려가 원 간섭기 이후로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로 이는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원나라 황제)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고려 국내의 정치, 의례에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정간섭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원 복속기에 들어 몽골 황제권이 고려 내정의 최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제로 권력 행사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였고, 고려국왕이 황제권으로부터 체포, 심문, 유배, 폐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충선왕과 충혜왕의 사례가 있다.)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 또한 제후국제로 격하됐으며 더나아가 정동행성을 매개로 각종 외로 아문 의례가 고려에 적용되었다.[18]
아래의 내용은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가 고려에 최소한의 외왕내제적인 모습들 마저도 완전히 금지한다고 통보한 글이다. 이는 고려가 원 간섭기 이후로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왕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고려사 권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이 밖에도 충렬왕이 원의 사신을 맞이할때 성관(省官)이 “부마왕께서 사신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선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왕께서는 역시 외국지주(外國之主)이시니 조서가 도착하면 반드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한 사례 또한 원 간섭기 당시 고려의 위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충렬왕이 원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하다
忠烈王元年五月甲戌 王聞詔使來, 率宰樞·侍臣, 時服迎于西門外. 王旣尙公主, 雖詔使, 未嘗出城而迎. 舌人金台如元, 省官語之曰 “駙馬王不迎詔使, 不爲無例. 然王是外國之主也, 詔書至, 不可不迎” 至是迎之.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 5월 갑술, 왕이 조서를 지닌 사신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재추(宰樞)·시신(侍臣)들을 거느리고 시복(時服) 차림으로 서문 밖에서 맞이하였다. 왕은 이미 원(元) 공주와 혼인하였으므로, 비록 조서를 지닌 사신이라도 일찍이 성 밖까지 나가 맞이한 적이 없었다. 통역[舌人] 김태(金台)가 원에 갔을 때 성관(省官)이 이것을 말하며 이르기를, “부마왕께서 사신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선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왕께서는 역시 외국지주(外國之主)이시니 조서가 도착하면 반드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해서, 이때에 이르러 맞이하게 되었다.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19 > 예7(禮 七) > 빈례 > 충렬왕이 원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하다
또한 이후 시작된 충(忠)자돌림 시호를 보면 완전히 종속된 속국 또는 속령 고려의 위상이 나타난다.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忠宣王二年, 元賜謚忠烈, 恭愍王六年, 加景孝.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원(元)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고려사 권제32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 7월 13일(음) 기사(己巳)년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고려에서는 이전에는 독자적으로 묘호와 시호를 선왕에게 올리곤 했으나 이를 처음으로 부정한 국왕이 있었으니, 바로 충선왕이었다. 이는 원나라의 완전히 복속된 고려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왕이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다
丙申 有司議上大行王謚, 王不可曰, “有上國, 在我且請之. 竹冊·玉冊, 亦合於禮乎?” 於是, 但上號曰純誠守正上昇大王.
병신 유사(有司)가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의논하자 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상국(上國)이 있으니 나로서는 단지 시호를 청할 따름이다. 죽책(竹冊)이나 옥책(玉冊)이 또한 예(禮)에 부합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단지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는 호칭만 올렸다.고려사 > 권33 > 세가 권제33 > 충선왕(忠宣王) 복위년 > 10월 > 왕이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다
신하들의 시호 추증 요청에 대한 충선왕의 대답은 상국에게 시호를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더 이상 조공-책봉이 형식상의 관계가 아닌 그 실질성을 내포하게 된것을 의미했다. 원나라측에서의 고려의 시호요청에 대한 대답은 충선왕 2년(1310)에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원이 왕(충선왕)의 3대 조상을 추증하다
을미 원(元)이 제서(制書)를 내려 왕의 3대조를 추증하였다.
중략..
〈왕철(고종)에게〉 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太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高麗國王)을 추증하고 시호는 충헌(忠憲)으로 한다.
중략..
〈왕식(원종)에게〉 단성봉화보경양절강제좌리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 大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高麗國王)을 추증하고, 시호는 충경(忠敬)이라 한다.
중략..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아버지인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태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 太尉 開府儀同三司 征東行中書省右丞相 上柱國 駙馬 高麗國王) 왕거(王昛, 충렬왕)는 효를 옮겨 〈우리에 대한〉 충성으로 〈백성에게는〉 위세를 바꾸어 은혜를 베풀었다. 중략.. 정결한 혼백이 위로하는 글[恤章]을 잘 받기를 바라면서,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인량화봉경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 大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駙馬 高麗國王)으로 추증하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라 한다.
중략..
처음에 나라에서는 송(宋), 요(遼), 금(金)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였으나 역대의 시호는 모두 종(宗)이라고 칭하였다. 원을 섬기기 시작하자 명분이 더욱 엄중해져서 옛날 한(漢)의 제후들이 모두 한의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도 표문을 올려 상승왕(上昇王: 충렬왕)의 존호를 청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두 왕도 추시(追諡)해줄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권33 > 세가 권제33 > 충선왕(忠宣王) 2년 > 7월 > 원이 왕의 3대 조상을 추증하다
이렇게 고려 고종에게는 충헌, 고려 원종에게는 충경, 충선왕의 아버지는 충렬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충선왕의 복위 이후 원 황제가 보낸 조서의 내용을 보면 신하로서의 고려 국왕의 지위가 어떠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辛亥 元遣使來, 詔曰, “緊爾東藩, 世守臣職, 子承父爵, 典制具存. 近, 高麗王王琚遺奏, 以其子王璋襲爵. 朕惟王璋, 親惟聖祖之甥, 懿乃宗姬之壻, 嘉謀偉績, 俱有可稱. 久侍闕庭, 備殫忠力, 特授征東行中書省右丞相高麗國王, 依前開府儀同三司太子太師上柱國駙馬都尉瀋陽王. 自今以始, 益謹畏天之戒, 勉修事上之誠. 群工庶職, 各守常規, 士庶緇黃, 無失其業.”
신해 원(元)이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동쪽의 번국(蕃國)인 그대 나라는 대대로 신하의 직분을 지켰으며, 아들이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였으니 전례(典禮)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근자에 고려의 왕 왕거(王琚)가 유서(遺書)로 아뢰기를 그의 아들 왕장(王璋)이 작위를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짐이 생각하건대 왕장은 친히 우리 세조(世祖) 황제의 외손이며 황실 종친[宗姬]의 사위로서 아름다운 계책과 훌륭한 공적은 모두 칭찬할 만하다. 오랫 동안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충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특별히 정동행중서성우승상 고려국왕(征東行中書省右丞相 高麗國王)으로 제수하며, 전과 같이 개부의동삼사 태자태사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開府儀同三司 太子太師 上柱國 駙馬都尉 瀋陽王)으로 한다. 지금부터는 더욱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성실할 것이며 상국(上國)을 섬기는 정성을 힘써 닦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각각 규범을 지킬 것이며, 뭇 백성[士庶]과 승려[緇], 도사[黃]들도 자기의 생업을 잃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권33 > 세가 권제33 > 충선왕(忠宣王) 복위년 > 10월 >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들을 직접적으로 폐위 또는 즉위시키기도 하였는데 아래는 그에 대한 기록들이다.
태상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다
壬申 太上王餞于金郊, 酒酣, 使臣孛魯兀, 以帝命, 取國王印, 授逸壽王. 於是, 太上王復位.
임신 태상왕(太上王)이 금교(金郊)에서 〈왕을〉 전송하였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원(元)의〉 사신 패로올(孛魯兀, 보로우)이 황제의 명으로 국왕(國王)의 인장(印章)을 빼앗아 일수왕(逸壽王)에게 주었다. 이에 태상왕이 복위(復位)하였다.권33 > 세가 권제33 > 충선왕(忠宣王) 즉위년 > 8월 > 태상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다
원 황제가 왕의 장자 도를 왕으로 책봉하다
甲寅 以長子江陵大君燾, 見于帝, 請傳位, 帝乃策燾爲王. 是時, 朝廷欲王歸國, 王無以爲辭, 乃遜其位. 又以姪延安君暠爲世子. 王嘗封瀋王故, 時稱瀋王.
갑인 〈왕이〉 장자(長子)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도(王燾)를 황제에게 알현시키고 전위(傳位)하기를 청하자 황제가 곧 왕도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원〉 조정에서 왕을 귀국시키려고 하자 왕이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에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또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를 세자로 삼았다. 왕이 일찍이 심왕(瀋王)에 책봉되었으므로 당시에 심왕이라 일컬어졌다.권34 > 세가 권제34 > 충선왕(忠宣王) 5년 > 3월 > 원 황제가 왕의 장자 도를 왕으로 책봉하다
원 황제가 상왕을 복위시키고 국새의 회수를 명하다
원(元)이 유수(留守) 보수(寶守)와 전 이문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 등을 보내오자 왕이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장백상이 성지(聖旨)를 전하며 말하기를, “이미 정월 2일에 상왕(上王)에게 복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장백상이 국새(國璽)를 회수하고 모든 창고를 봉하였으며, 왕은 드디어 원으로 갔다.
중략..
충숙왕 후5년(1336)에 황제가 왕을 환국(還國)시켰다. 〈충숙왕〉 후8년(1339) 3월 계미에 충숙왕이 훙서하였다. 충숙왕은 늘 왕을 발피라고 부르면서 야박하게 대하였지만 명을 내려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행성(行省) 좌우사(左右司)가 그 뜻을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전하였고, 왕 역시 전 평리(評理) 이규(李揆) 등을 보내어 왕위를 잇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백안이 태사(太師)가 되어 그 요청을 감추고 황제에게 아뢰지도 않았으며 말하기를, “왕도(王燾, 충숙왕)는 본래 좋은 사람이 아닌데 또 병이 있으니 죽게 될 것이다. 발피는 비록 적장자(嫡長子)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왕으로 복위시킬 필요는 없다. 왕으로서는 오직 왕고(王暠)만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규(李揆) 등이 백방으로 요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권36 > 세가 권제36 > 충혜왕(忠惠王) 2년 > 2월 > 원 황제가 상왕을 복위시키고 국새의 회수를 명하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직접적인 사법권도 행사하였는데 그 대상에는 고려의 군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壬寅 趙仁規·印侯還自元, 廢慶昌宮主爲庶人, 流琮及終同于海島.
임인 조인규(趙仁規)와 인후(印侯)가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경창궁주(慶昌宮主)를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삼고 왕종(王琮)과 종동(終同)을 바닷섬으로 유배 보냈다.권28 > 세가 권제28 > 충렬왕(忠烈王) 3년 > 9월 >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임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참소하다
인종이 죽게 되자 황태후도 또한 물러나 별궁(別宮)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임백안독고사는 더욱 거리끼는 바가 없어져 팔사길(八思吉, 바스기)에게 뇌물을 후하게 바치고 온갖 방법으로 〈충선왕을〉 무고하고 참소하였다. 영종(英宗)은 사신을 파견하여 전민(田民)을 그에게 다시 되돌려주고, 왕을 토번(吐蕃)으로 유배 보냈다. 〈그 뒤에도〉 임백안독고사의 참소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할 수 없었으나, 승상(丞相) 배주(拜住, 바이주)가 구원해 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려사 > 권122 > 열전 권제35 > 환자(宦者) > 임바얀퇴귀스 > 임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참소하다
원 사신 내치 등이 정동행성에서 왕을 체포해서 압송해가다
갑신 원(元)에서 교사(郊社)를 지내고 사면령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대경(大卿) 타적(朶赤, 도치)과 낭중(郞中) 별실가(別失哥, 베시게) 등 6인을 보내왔다. 왕이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 하자 고용보(高龍普)가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늘 국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왕께서 나가서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에 타적과 내주(乃住, 나이주)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하였다. 왕이 급히 원사(院使)인 고용보를 불렀지만, 고용보는 왕에게 〈도리어〉 욕을 하였다. 원의 사신들이 모두 칼을 빼어 들고 왕을 시종하는 군소(群小)들을 체포하였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쳐 숨었는데,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와 만호(萬戶)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찔리고, 지평(持平) 노준경(盧俊卿)과 용사(勇士) 2인은 살해되는 등 칼과 창에 찔린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병사를 매복시켜 밖을 방어하며 조력하는 사이에 타적 등은 왕을 부축하여 말 한 필에 싣고 달려갔다. 왕이 조금만 쉬자고 청하였지만 타적 등은 칼을 뽑아 들고 협박하였다. 왕은 매우 괴로워서 술을 찾았는데 어떤 노파가 술을 바쳤다.권36 > 세가 권제36 > 충혜왕(후)(忠惠王(後)) 4년 > 11월 > 원 사신 내치 등이 정동행성에서 왕을 체포해서 압송해가다
또한 1263년부터는 경제적인 피해 또한 크게 발생하게 되는데 원종이 쿠빌라이 카안의 명령으로 이전에 비해 막대한 양의 세공과 의례적인 방물을 계속 바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은 삼별초 토벌과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전국 각지에 수시로 농무별감(農務別監)을 파견해 헐값으로 고려 농민들의 소와 농기구를 구입해갔는데, 거의 빼앗다시피한 반 강제적 수탈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당했다. 고려는 총 5,000여 마리의 농우를 원나라에 빼앗겼는데 이 당시 전국 농가의 사육소 수는 1만여 마리로 추정된다.[19]
【고려사 세가 기사 】
또 몽골 중서성(中書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황제의 뜻을 받들어 둔전에 필요한 소 6천 두 중 동경(東京) 등지에서 보낸 3천 두를 제외한 나머지 3천 두는 경략사(經略司)로 하여금 돈을 수령해 고려 현지에서 사들이도록 조치했소. 그 외 농기구·종자·사료 등의 물품 및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그 쪽에서 맡아 부족하지 않게 전량을 공급해 주기 바라오." 계유일. 봉주경략사(鳳州經略司)에서 비단 12,350필을 가지고 와서 농우(農牛)를 사갔다.[20]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이에 원종은 전중감(殿中監)[21] 곽여필(郭汝弼)을 원에 보내 고려의 사정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한다.
【고려사 세가 기사 】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아국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그러나 고려국왕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되려 고려는 농우 2,000마리를 추가로 공급하라는 원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려사 세가 기사 】
병신일. 각 도에 농무별감(農務別監)을 보내 농우와 농기구를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와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납부할 것을 독촉하게 했다.
"여러 번 독촉하기에 농우 1,010두, 농기구 1,300개, 종자 1,500석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올해 안으로 계속 뒤진다면 농우 990두를 채울 수 있겠기에 그것으로 숫자를 재약정했습니다."
"아아! 우리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백성인데 농우·농기구·종자를 모조리 빼앗아 생업을 상실하게 만들면 그들이 모두 굶어죽게 될까 걱정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는 사람은 번다한 부역으로 힘이 다해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반면 역적 편에 선 자가 굶주림이나 고통이 없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역적 편에 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4월 ㅡ
원나라는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고 고려로부터 각종 군사 원정을 위한 선박과 군량미를 보급받았는데, 기록에 잡히는 수치로만 미곡 약 85만 석[22], 우마 사료 46만 6천여 석, 종자 1만 5천여 석을 원으로부터 수탈당했다. 물론 이 수치는 최소치이며 기록에 잡히지 않는 수탈량은 누락되었다.
1270~72년(진도 원정)
【고려사 기사 】
"정규군 6천 명이 몰고 다니는 말을 대략 한 명당 세필로 계산하면 모두 1만 8천 필에 달하는 바, 한 필에 하루 닷 되씩 사료를 지급한다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쳐서 상국의 단위로 13만 5천 석에 이르며, 본국의 단위로는 27만 석에 이릅니다. 거기에다 농우 4천 마리에 드는 사료가 한 마리당 하루 닷 되씩 든다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국의 단위로 3만 6천 석이며, 본국의 단위로는 7만 2천 석이나 됩니다."
ㅡ <고려사>, 원종12년(1271), 8월 ㅡ
경오년(1270)으로부터 금년 4월 그믐에 이르기까지 이미 요구에 따라 조달한 군량이 109,199석 6두, 마소의 사료가 432,005석 6두, 수도의 객관에서 사신 접대용으로 쓴 쌀이 17,151석, 종자가 15,000석으로 상세한 세목은 별도로 첨부한 도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진작부터 궁핍에 절어 전자에 할당받은 수량도 가을까지 댈 수 없을까 고민인데, 하물며 다시 첨가까지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ㅡ 1272년 4월 ㅡ
고려사 기사 내용을 토대로 계산하면 군량 11만여 석 + 사신 접대용 쌀 1만 7천여 석 = 12만 7천여 석 / 우마 사료 43만 2천여 석 / 종자 1만 5천여 석.
1273년(제주도 원정)
【고려사 기사 】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힌두(忻都)가 명령하기를, ‘탐라(耽羅) 토벌군의 군량은 반드시 3개월 분량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수량을 채우려면 반드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녹전(祿轉)으로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재추(宰樞)에게 대책을 묻자, 모두 말하기를, "강화도에서 수도로 나온 이래 각 도(道)에서 조운(漕運)으로 운송한 곡식은 모두 사용하여 창고는 비고, 경략사(經略司)와 기타 제반 공급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慶尙道)의 경오년(庚午年, 1270)과 신미년(辛未年, 1271)의 2년간의 조세를 운송하여 군량을 도와주고, 전주와 나주의 임신년(壬申年, 1272) 녹전(祿轉)[23]을 전부 우리에게 납부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ㅡ <고려사>, 1273년 4월 ㅡ
또 지난해(1273) 4월에는 대군이 탐라에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5월 그믐에야 돌아오는 통에 백성들이 농사철을 맞추지 못해 가을에 수확할 곡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관청과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여 배를 건조하는 인부와 기술자, 주둔군, 행군하는 부대, 제주 백성들에게 무려 4만 석이 넘는 군량과 사료를 공급하는 부담을 졌습니다.
ㅡ 1274년 2월 ㅡ
: 군량 최소 4만석 이상 / 기타 사료
1274년(1차 일본 원정)
【고려사 기사 】
정월 보름날부터 조선을 시작했는데 기술자와 일꾼이 모두 30,500명이니 1인당 1일 3식으로 계산하면 34,312석 5두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정월 19일에 받은 중서성의 공문에는, ‘힌두(忻都) 관인(官人) 휘하의 군사 4천 5백명이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까지 행군하는데 필요한 군량 1,570석(碩)과 주둔지에서 필요한 군량과 사료 및 조선감독(造船監督) 홍총관(洪摠管)의 군사 500명의 행군에 필요한 군량 85석도 부담하라.’고 했습니다. 또 제주(濟州)에 남아 있는 상국의 군사와 우리나라의 사졸 1천 4백명의 7개월 분 군량과 사료는 이미 지급을 완료했는데 모두 2,904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주(羅州)에 뒤처져있는 월로활단적(粤魯闊端赤)의 군량 8천석과 말 사료 1,325석도 모두 저희나라에서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 지원(至元) 10년(1273) 12월에 접수한 중서성의 공문에는, 제주 백성 10,223명에게 식량을 모두 공급하라고 했으니 최근에는 군량과 사료를 도저히 조달할 길이 없어 관청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량을 거둬들였습니다.ㅡ <고려사>, 1274년 2월 ㅡ
: 일꾼 3만여 명의 식량 34,000여 석 + 군량 1,570석 + 85석 + 2,904석 + 8,000석 = 46,559석 (말 사료 1,325석은 제외)
그런데 또 다시 중서성은 문서를 보내 봉주둔전군(鳳州屯田軍)에게 매달 부족한 군량 2,047석과 소 사료 1,001석 7두를 부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농우(農牛)와 농기구, 종자와 첫 해 가을까지의 식량을 지급하였으며, 또한 지원 9년(1272)의 부족한 식량까지도 이미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작년에는 농사가 전혀 수재나 병충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구실로 내세워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아국이 공급하게끔 만드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없는 말을 꾸며 보고함으로써 해마다 공급하게 하고 공급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정말로 민망한 일이니 바라건대 이 부담들을 모두 면제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ㅡ 1274년 2월 ㅡ
: 봉주둔전군(몽골군)에게 첫 해 가을까지 지급한 식량은 2,047석 x 약 10개월 = 20,470석 (소 사료 1,001석 7두는 제외)
원이 여룡우사(汝龍于思)를 파견하여 견(絹) 33,154필을 가지고 와서 군량(軍粮)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곧 관견도감(官絹都監)을 설치하고 견직(絹織)을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개경(王京)에 4,054필, 충청도(忠淸道)에 4,000필, 경상도(慶尙道)에 20,000필, 전라도(全羅道)에 5,000필을 할당하여 매매하니 견 1필에 쌀 12두(斗)[24]로 계산하였다.
ㅡ 1274년 4월 ㅡ
: 4,054 + 4,000 + 20,000 + 5,000 = 33,054 x 12두 = 396,648두. 쌀 1석 당 10두에 해당하므로 396,648두는 39,664석에 해당.
∴ 1차 일본원정(1274) 기간 동안 징발당한 쌀의 양 = 46,559석 + 20,470석 + 39,664석 = 106,693석(약 10만석 이상)
1277년
원정이 없는 기간에도 고려는 몽골 주둔군을 위한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다.
【고려사 기사 】
"방금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접수한 바, 그 내용은 추밀원(樞密院)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홍다구(洪茶丘)를 고려에 보내 힌두(忻都)와 함께 일본원정에서 돌아온 3천 명을 훈련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번 추밀원에서는 ‘참군(站軍) 2백 명과 환가둔전군(還家屯田軍, 일본 원정에서 귀환한 군인들) 3천 명 및 코데치(闊端赤, 대궐을 수비하는 몽골 군대)에게는 앞서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와 꼭 같이 식량과 사료를 공급하라.’고 공문으로 알려왔습니다. .... (중략) .... 추밀원의 공문을 받기 전에도 저희나라는 지원 7년(1270) 이래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을 정벌했던 상국 군대의 군량을 모두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공급한 바 있습니다. 그 후에도 현재 있는 합포진변군(合浦鎭邊軍), 탐라방호군(耽羅防護軍), 염주(塩州)·백주(白州)의 귀부군(歸附軍, 몽골에 투항한 남송군), 코데치(闊端赤) 등에게 1년간 군량 18,629석(石) 2두(斗)와 우마의 사료 32,952석(石) 6두(斗)를 지급했으니 이는 모두 중국의 도량형에 따라 계산한 것으로 역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ㅡ <고려사>, 1277년 2월 ㅡ
중국 기준 군량 18,629석 x 2 = 고려 기준 37,258석으로 대략 3만 7천여 석 / 우마의 사료 33,000여 석
1278년
봄 정월. 서해도의 전미(轉米)를 원수 홍다구(洪茶丘)의 군대에 지급하고, 아울러 백관에게 꼴과 콩을 내어 힌두(忻都·홍다구의 군대에 배급할 것을 명령하였다.
ㅡ <고려사>, 1278년 1월 ㅡ
1280년~1281년(2차 일본 원정)
【고려사 기사 】
아국에서는 이미 병선 9백 척, 뱃사공과 선원 15,000명, 정군(正軍) 1만 명 및 중국 단위로 계산해 군량 11만 석을 마련했으며, 기타 군수물자도 셀 수 없을 만큼 갖추었으니 이제 있는 힘을 다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중략)... 현재의 군량은 중국 단위로 70,727석을 제외해 놓고는 전국적으로 공적·사적인 비축분이 죄다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에, 각급 관원의 월봉과 국가에 필요한 각종 부세(賦稅)를 다 전용하는 한편 다시 전국의 민호에서도 거두어들인 결과 가까스로 중국 단위로 4만 석을 마련했는바 여기서 더 내라고 하면 도저히 더 이상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ㅡ <고려사> 1280년 11월 ㅡ
원나라에서 불팔사(不八思)·풍원길(馮元吉)을 보내어 와서 군량미를 파악하게 하였다. 또 동정군(東征軍)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군사 3백 40명을 보내어 합포(合浦)를 지키게 하고, 군사 60명에게 왕경(王京)을 지키게 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동정할 때에 지출한 군량미는 12만 3천5백60여 석(碩)이었다.
ㅡ <동국통감>, 1282년 4월 ㅡ
군량 12만 3천5백60여석(중국 단위) => 고려 단위로 환산하면 그 두 배인 24만 7천1백20석 (중국 석수 계산법은 원종12년 8월 <고려사> 기사 참조.)
1283년 3월~5월(3차 일본 원정)
【고려사 기사 】
왕이 재추들에게 묻기를, "원나라 조정에서 송번의 말을 듣고 군량미 4만 석을 더 징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전번에 유주(庾賙)가 20만 석을 부과하자고 청하였는데, 집집마다 추렴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사람에게까지 모두 긁어 모아서, 겨우 그 4분의 1(=5만 석)을 마련하였는데, 만약 4만 석을 더하기로 한다면, 어찌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사람을 보내어 주청(奏請)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ㅡ <고려사>, 1283년 4월 ㅡ
: 군량 5만 석 + 추가 4만 석 = 9만 석
1285년 11월~1286년 1월(4차 일본 원정)
【고려사 기사 】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배 만드는 것을 독려하였다. 동지밀직사사 송빈(宋玢)을 경상도 조선 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로 삼고,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일을 독려하게 하였다.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군량미 10만 석을 징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5년 12월 ㅡ
: 군량미 10만 석
1289년
중국 동북방에 기근이 들자 원나라는 이를 빌미로 군량(軍粮) 10만석을 요구해오고[25] 고려는 그 중 6만 8천석을 부담하게 된다.
【고려사 기사 】
요동(遼東, 랴오닝)에 기근이 들자 원(元)에서 장수지(張守智) 등을 보내어 본국으로 하여금 군량(軍粮) 10만 석을 거두어 요동(遼東)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명해 쌀을 차등 있게 내게 하였는데 ... (중략) ... 산직을 하사받은 자는 7두, 군관(軍官)·백성(百姓)과 공·사노비는 각각 5두와 3두로 하였다. 부상(富商, 부유한 상인)과 대호(大戶)는 3석, 중호(中戶)는 2석, 소호(小戶)는 1석으로 하였다. 동계(東界)와 평양(平壤)을 제외한 각 도(道)에 쌀을 차등 있게 옮기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9년 2월 ㅡ
감찰사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와 직사관(直史館) 진과(陳果) 등을 파견하여 배 483척과 선원 1,314명을 동원하여 쌀 64,000석(石)을 개주(盖州, 랴오닝성 가이펑)로 운송하게 하였다. .... (중략) .... 내고(內庫, 왕실 창고)의 쌀 4,000석(石)을 내어 군량(軍粮)에 보충하였다.
ㅡ 1289년 3월 ㅡ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를 파견하여 개주(盖州)로 군량(軍粮)을 수송하였다
ㅡ 1289년 5월 ㅡ
1293년(5차 일본 원정)
원(元)에서 만호(萬戶) 홍파두아(洪波豆兒, 홍바투르)를 보내어 선박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보전고부사(寶錢庫副使) 첨사정(瞻思丁)은 군량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장차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홍파두아는 곧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데, 왕궁을 바라보고는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비록 금의환향(衣錦還鄕) 하지만 직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부끄럽다."하였다.
ㅡ <고려사>, 1293년 8월 ㅡ
1295년
요양과 심양에 기근이 들고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다시 식량을 징발당한다.
【고려사 기사 】
정사일. 장군(將軍) 지단(智團) 등으로 하여금 배 73척(艘)에 쌀 1만 석을 선적해 요양(遼陽)으로 수송하게 했다.
ㅡ <고려사>, 1295년 3월 ㅡ
기묘일. 장군(將軍) 김영손(金永孫)을 보내어 배 90척으로 쌀 12,180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4월 ㅡ
계유일. 중랑장(中郞將) 조침(趙琛)을 원(元)에 보내어 제주(濟州)의 방물을 진헌하였고, 장군(將軍) 서광순(徐光純) 등을 보내어 배 65척으로 쌀 8,568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윤4월 ㅡ
: 1만 석 + 12,180석 + 8,568석 = 30,748석
1309년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고려사>, 충선왕 원년(1309), 3월 ㅡ
그 밖에도 원나라가 요구할때마다 수시로 양곡을 반출당했다.
또한 고려는 원에 공녀(貢女)의 진상을 강요받았는데 이를 위해 원나라에서 해마다 매빙사(媒聘使)가 다녀가고, ‘결혼도감(結昏都監)’이라는 별도의 행정 기구까지 설치되었다. 결혼도감은 원나라 장수들과 투항한 남송 병사들을 위문할 고려 여성들을 차출해가기 위한 기구였다. 결혼도감이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만 무려 140명의 고려인 여성들이 만자(蠻子)에게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만자는 옛 남송(南宋)의 군대로서 원나라의 군대에 그대로 흡수된 것으로 강남(江南)의 신부군(新附軍) 또는 귀부군(歸附軍)이라고도 불렸다.
【고려사 세가 기사 】
원나라에서 만자(蠻子) 매빙사(媒聘使) 초욱(梢郁)을 보내면서 그 편에 다음과 같은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전달하게 했다. "남송(南宋) 양양부(襄陽府, 오늘날 후베이성)에 새로 편성된 군인(軍人)들이 처를 구하기에 선사(宣使) 초욱으로 하여금 관청 소유 견직(絹織) 1,640단을 가지고 고려국으로 가게 조치했으니 해당 관청을 시켜 관원을 파견해 함께 처가 될 여자들을 물색하도록 하기 바란다." 초욱이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뽑아내라고 심하게 독촉하자 결혼도감(結昏都監)을 설치하고 그때부터 가을까지 민간의 홀어미, 역적의 처, 승려의 딸을 샅샅이 찾아내어 겨우 그 수를 채우니 원성이 크게 일어났다. 한 여자마다 혼례비용으로 비단 12필씩을 지급한 후 만자(蠻子)들에게 각각 보내주자 만자들이 즉시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통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니 보는 사람마다 슬피 흐느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3월 ㅡ
한편, 공녀 징발 대상으로는 재상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미 사위가 있는 집안도 딸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다.
【고려사 세가 기사 】
탈타아(脫朶兒, 톡토르)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반드시 재상 가문에서 보려고 하자,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두려워하며 다투어 먼저 사위를 들였다. 나라에서 재상 가문 두세 곳을 적어 주고 스스로 택하라고 하였더니 탈타아가 외모가 예쁜 사람을 골라서 김련(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려고 하자, 그 집에서는 이미 데릴사위[預壻]를 들였는데 그 사위가 두려워하며 집을 나가버렸다. 김련이 그때 원(元)에 입조(入朝)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는 김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례를 치르자고 요청하였으나 탈타아는 듣지 않았다. 고려(高麗)의 풍속에 나이 어린 사람을 데려다가 집안에서 길러 나이가 차면 사위로 삼는 것을 데릴사위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 2월 ㅡ
이렇게 원나라로 보내진 공녀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곡(李穀)이 원(元)에 올린 다음의 상소문을 보자.
【고려사 세가 기사 】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에 있었는데,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처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 두기를 청하고, 이를 위해 대신해서 소(疏)를 작성하여 말하기를, .... (중략) .... "풍문으로 들으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며,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매번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득 실색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무얼 하러 왔을까? 동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이윽고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딸을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해서는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혀서 딸들이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 사신이 한번 오게 되면 나라가 온통 소란스러워져서 비록 개나 닭이라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동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을 때가 되면,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여 같지 않은데,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놓아줍니다. 놓아주고는 다른 데서 동녀를 찾게 되므로, 1명의 동녀를 취하는 데에도 수백 집을 뒤집니다. 오로지 사신의 말만 들을 뿐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신들이 황제의 성지(聖旨)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년에 두 번, 혹은 한 번이거나 한 해씩 거르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많으면 40~50명에 이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숙왕 후4년(1335) 윤12월 ㅡ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 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본다.[26]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27]
한 번에 500여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고려사 세가 기사 】
이렇게 원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 공녀의 가족들은 그 댓가로 원으로부터 비단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고려 정부의 '가로채기'로 빼앗기게 된다.
"지원(至元) 13년(1276) 귀환하는 귀부군(歸附軍)들의 처를 맞아주기 위해 가져온 비단들은 다루가치로 하여금 거두어들여 보관토록 조치했는데 농우와 농기구의 값은 그 가운데서 치르게 해 주십시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3년(1277), 2월 ㅡ
딸을 가진 집안은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갓난아기를 안고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고려 특단의 조치는 힘 없는 서민들의 마지막 발버둥마져도 수포로 만들어 버린다.
임자일. 장차 처녀들을 원(元)에 바치기 위하여 국내의 혼인을 금지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원년(1275), 10월 ㅡ
왕이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양가(良家)의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뒤에 혼인하고,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라."라고 하고, 허공(許珙) 등에 명령하여 어린 동녀(童女)를 선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13년(1287), 12월 ㅡ
고려인들의 반발은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었는데 이곡의 상소문에서 보듯 딸과 처를 가진 자들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때마다 늘 가슴을 조려야 했고 딸을 숨기는 자는 그 이웃과 친족을 괴롭혀서라도 반드시 추쇄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인신매매뿐만 아니라 공녀를 추쇄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사신들의 뇌물 수수 역시 큰 골칫거리였다. 상기했듯 1명의 공녀를 취하는데도 수백 집을 뒤져서 주민들을 수탈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일각에서 공녀 제도를 미화하기 위해 종종 들먹이는 기황후 일화는 매우 특수한 사례로서 극히 일부의 사례를 가져다 놓고 전체를 포장할 수 없는 법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어 출세한 극소수 친일파들이 그 당시 전체 조선인들의 운명을 대변할 수 없듯이 공녀 제도를 미화하는 논리의 가장 큰 맹점은 그 당시 원에 끌려간 공녀 대다수의 실상을 철저히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기록은 공녀에 대한 현대인들의 잘못된 환상을 철저히 깨부수어 준다.
【고려사 기사 】
순마소(巡馬所)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의 딸을 뽑아 황제와 사신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백관들에게 몰래 딸이 있는 집을 적어서 주관하는 관청(主司)에 넣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눈을 흘기고 원망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비록 딸이 없어도 딸이 있다고 지목하였으므로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닭과 개도 편하게 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몰래 사위를 들이는 자들이 많았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4년(1298), 1월 ㅡ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의 반열에 있기도 하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한 자의 배필이 되기도 하여 공경대신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고려의 외생(外甥, 사위)입니다. 이것은 본국(고려)의 왕족과 문벌 및 호부한 집안에서 특별히 조서나 지(旨, 황제의 뜻)를 받았거나 혹은 마음으로 원하여 스스로 온 자들이며 또한 중매의 예를 갖춘 것으로 실로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익을 좇는 자들'이 이것을 끌어와 예로 삼고 있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일단 (공녀) 선발에 들어가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모여서 우는데 밤낮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그 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예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당당한 천자의 조정으로서 어찌하여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여 반드시 외국에서 취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받아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인데, 지금 궁궐에 두고 시기를 넘겨서 헛되이 늙게 하거나 때로는 혹시 내보내어 환관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끝내 후사가 없는 자가 10명 중 5~6명이나 되니, 그 원망하는 기운이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떻겠습니까?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이처럼 원에 공녀로 끌려가게 된 여성들 과반수는 중세 여성의 최고 권리 중 하나인 '자식을 보는 권리'마저도 박탈당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 원나라가 특산품들을 조공으로 요구해 올 때 마다 고려는 개, 말, 쇠고기, 인삼, 진주, 백조(白鳥, 고니), 매(鷹), 은(銀), 여의주 등 막대한 양의 특산품들을 수시로 바쳐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원나라에 매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응방(鷹坊)[30]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고려사 기사 】
병신일.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응방(鷹坊)에 속한 백성 205호(戶) 중에서 102호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에 모든 백성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투어 응방 소속으로 들어가버린 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한 것은 거짓이고 102호를 없앤다는 것도 9마리 소에서 털 한 가닥을 뽑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응방에서는 오히려 은(銀)·모시(紵布)·가죽·베를 그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여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매(鷹)를 먹이는 것이 고기가 아니고 은과 베가 매의 배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ㅡ 충렬왕 3년(1277), 7월 ㅡ
그러나 응방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충렬왕의 노력은 친원파의 반대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원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고려사 기사 】
대장군 인후(印侯)와 장군 고천백(高天伯)이 타나(塔納)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타나가 절령참(岊嶺站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하자 옹진현(甕津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등 여러 현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타나에게, "우리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응방(鷹坊)에 예속되었으니 가난한 백성들이 무엇으로 국가의 비용을 감당하겠습니까? 차라리 주기(朱記)를 나라에 반납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들은 타나가 개경(開京)에 도착해 재상더러 이렇게 질책했다. "동방의 백성은 천자의 적자가 아니오? 백성들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구휼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책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이오?" 이에 재상들이 왕에게 응방의 폐해를 없애야한다고 건의했더니 왕이 노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回回, 위구르) 사람을 요청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 도의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조인규(趙仁規)[31]가 극력 간쟁하고 공주도 또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다.
ㅡ 충렬왕 6년(1280년), 3월 ㅡ
다음은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수탈당한 기록들이다.
【고려사 기사 】
몽고(蒙古)에서 필도적(必闍赤, 비칙치) 흑구(黑狗)와 이추(李樞) 등 7인을 보내 궁실(宮室)을 지을 재목을 요구하였으며,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공문을 보내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자나무(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 등 물품을 요구하였다.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회보하기를,“이번 중서성의 공문을 받아보니 고려는 아직 평온하지 못하므로 황제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올해의 조공하는 폐백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금칠은 소용되는 데가 많으므로 이제 필도적을 파견하여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 축적한 금칠은 육지로 나올 때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또 그 산지는 남쪽지방의 섬인데, 요사이 역적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기회를 보아 사람을 보내 채취하여 바치겠습니다. 우선 현재 남아있는 10항아리 분을 보내고, 옻칠액을 만드는 장인은 그 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 또 흑구가 말하는 비자나무는 지역민들이 백목(白木)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를 물으니 승천부(昇天府)의 금요도(今要島)라고 하였습니다. 청등과 팔랑충도 역시 이 섬에서 난다고 하고 또 진도(珍島)와 남해(南海) 등지에서도 난다고 하며, 비자나무 열매와 동백 열매(冬栢實)도 또한 거기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은 개경(王京)에서 1,000여 리가 넘기 때문에 바로 보내기가 어렵고, 이추가 가보지도 않고 되돌아 왔기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과 함께 각기 사람을 파견하여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우선 거두어들인 무늬 있는 비자나무 몇 조각을 보내며, 팔랑충은 이추가 처음에는 교동군(喬桐郡)에서 난다고 하기에 사람을 보내 채취하게 하였으나 없고, 또 금요도에서 난다고 하므로 다시 사람을 보내 조사할 예정입니다. 노태목·해죽(海竹)·동백(冬栢)·대자리(竹簟)는 현재 보유분을 모두 보내고, 오매·화리·등석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데 예전에 송나라 상선에서 얻은 것이 약간 있어서 아울러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ㅡ 원종 12년(1271), 6월 ㅡ
태부소경(大府少卿) 장계열(張季烈)을 몽고(蒙古)로 보내어 방물(方物, 특산품)을 바쳤다.
ㅡ 1260년 4월 ㅡ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박윤(朴倫)을 몽골에 보내어 방물을 진상하였다.
ㅡ 1262년 4월 ㅡ
예부낭중(禮部郞中) 고예(高汭)를 보내 암컷 새매 20마리와 동(銅) 612근을 바쳤다.
ㅡ 1262년 9월 ㅡ
좌정언(左正言) 곽여필(郭汝弼)을 몽골에 보내 암컷 새매를 바쳤다.
ㅡ 1263년 5월 ㅡ
광평공(廣平公) 왕순(王恂), 대장군(大將軍) 김방경(金方慶),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일(張鎰)을 몽고에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방물을 바쳤다.
ㅡ 1265년 1월 ㅡ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여의주(如意珠) 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송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진헌하도록 하였다.
ㅡ 1273년 3월 ㅡ
원경(元卿) 등을 원에 보내어 매를 진상하였다.
ㅡ 1275년 6월 ㅡ
대장군(大將軍) 윤수(尹秀)와 중랑장(中郞將) 박의(朴義)를 원에 보내어 새매를 진헌하였다.
ㅡ 1276년 6월 ㅡ
원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아(阿室迷里兒, 아시미리르)를 보내어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하였다. 임유간(林惟幹)이 탐라(耽羅)에서 진주를 얻지 못하자 민(民)들이 소장하고 있던 100여 개를 취하여 원으로 돌아갔다.
ㅡ 1276년 6월 ㅡ
중랑장(中郞將) 정복균(鄭福均)을 원(元)에 보내어 인삼을 헌상하였다.
ㅡ 1279년 10월 ㅡ
정사일. 주(州)와 군(郡)에 명령하여 사냥개를 바치라고 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진상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장군(將軍) 박의(朴義) 등 25인을 원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ㅡ 1282년 5월 ㅡ
응방(鷹坊) 패로한(孛魯漢, 보로칸) 등을 원에 보내어 매를 진헌하였다.
ㅡ 1282년 9월 ㅡ
낭장(郞將) 남유정(南裕廷)을 원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박구(朴球)를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ㅡ 1283년 7월 ㅡ
장군(將軍) 이병(李㻂) 등 28인을 원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ㅡ 1285년 6월 ㅡ
장군(將軍) 원경(元卿)과 환관인 낭장(郞將) 최세연(崔世延)을 원에 보내어 매를 헌상하였다. 최세연은 일찍이 그 처가 사납게 투기하는 것에 분노하여 스스로 거세한 인물이다.
ㅡ 1285년 7월 ㅡ
장군(將軍) 원경(元卿) 등을 원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ㅡ 1286년 6월 ㅡ
장군(將軍) 이병(李㻂)을 원에 파견하여 새매(鷂)를 바쳤다.
ㅡ 1288년 12월 ㅡ
원이 감찰(監察) 아로온(阿魯溫, 아루운)을 파견하여 은(銀)을 채굴하였다.
ㅡ 1289년 2월 ㅡ
대장군(大將軍) 유비(柳庇)를 원에 파견하여 모시와 베를 바치고, 장군(將軍) 남정(南挺)은 새매를 바쳤다.
ㅡ 1289년 6월 ㅡ
원이 아르군(阿魯渾)과 이성(李成) 등을 보내와 은(銀)을 채굴하였다.
ㅡ 1289년 7월 ㅡ
홍군상(洪君祥)이 원으로 돌아갔다. 장군(將軍) 홍선(洪詵)을 파견하여 홍군상과 함께 원에 가서 향차(香茶)와 목과(木果) 등의 물품을 바치게 하였다.
ㅡ 1292년 10월 ㅡ
대장군(大將軍) 홍선(洪詵)을 원에 파견하여 인삼(人蔘)을 바쳤다.
ㅡ 1293년 10월 ㅡ
낭장(郎將) 백견(白堅)을 원으로 보내 고니 고기를 바쳤다. 고니는 하양(河陽, 경북 경산)과 영주(永州, 경북 영천) 땅에서 많이 나는데,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잡게 하였으므로 그 일대가 전부 소란스러웠으며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ㅡ 1294년 12월 ㅡ
원에서 바이터무르(伯帖木兒)를 보내어 탐라(耽羅)의 말을 취하였다
ㅡ 1295년 3월 ㅡ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탐라(耽羅)에서 말 기르는 일을 변통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ㅡ 1296년 2월 ㅡ
장군(將軍) 이백초(李白超)를 원으로 보내어 탐라의 쇠고기를 바쳤다.
ㅡ 1298년 11월 ㅡ
대장군(大將軍) 이백초(李白超)를 원에 파견하여 인삼과 쇠고기를 바쳤다.
ㅡ 1300년 11월 ㅡ
원에서 환관 이삼진(李三眞)을 보내어 탐라(耽羅)의 쇠고기를 진헌하는 일을 중지시켰다.
ㅡ 1309년 7월 ㅡ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아버지인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태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 太尉 開府儀同三司 征東行中書省右丞相 上柱國 駙馬 高麗國王) 왕거(王昛, 충렬왕)는 효를 옮겨 (우리에게) 충성으로, (백성에게는) 위세를 바꾸어 은혜를 베풀었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을 닦음으로써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모두 빛났으며, 조심스런 마음을 가지고 큰 계책으로 나라를 다스릴 정책을 결정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되었을 때에 이미 황제(쿠빌라이 카안)의 따님에게 장가들고 곧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새 왕으로 하여금 공후의 자손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公孫之復始]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때때로 방물(세공)을 바치던 것을 혁파하여, 실로 매년 종친에게 세사(歲賜)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책임을 지고 동정(東征)을 나가 남면(南面)을 안정시켰으며 반란을 일으킨 나얀 대왕(乃顔大王)을 추격하여 요수(遼水)까지 앞장서서 쫓아가서 기습하여 태산으로 계란을 눌러버리듯[泰山壓卵] 적을 압도하였으니 전쟁의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역적의 머리가 이미 수중에 들어왔다. 비록 왕위에 재위한 지는 3기(三紀)밖에 되지 않았으나 나이는 칠순을 넘겼으니, 장수를 누렸다고 공언할 것이며 오늘날에 드문 일이다. 하물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착한 심성을 본받으니[式穀之是似] 이 사람은 세상이 없어져도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ㅡ <고려사 세가> 충선왕 2년 7월
3.3.2. 조선의 사례 [편집]
원래 명나라는 조선에게 조공품으로 금과 은을 요구했으나, 세종은 말과 포로 대체하였다. 명이 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반대 급부인 사여(賜與. 말값)를 포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미리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품을 줄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하자 태종은 거절했다. 무조건 현금 박치기. 나중에는 이상하게 사여품을 명나라가 먼저 주고 조공품인 말은 나중에 줬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결제. 게다가 말값은 조선에서 정했다.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 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 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상등마는 당시 가격으로 아무리 낮아도 쌀 300두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은 여진에서 말을 조공받기도 하였는데(말하자면 수입) 이때도 말값은 조선이 정했다.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이때의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두. 한마디로 조선은 엄청난 폭리를 누렸다. 심지어 정난의 변 와중에는 건문제에게 후진 말을 팔아먹고도 이걸 명나라에서 추궁할까 봐 그 담당 관리를 보호하려 했던 케이스도 있다. 항목 참조.
그러나 이는 조선이 팔고 싶어서 팔았다기 보기엔 힘든데, 명의 사정에 맞춰서 갑자기 많은 숫자의 말을 팔라고 하는 경우도 많아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유쾌한 거래[33]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기병 전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신하의 간언이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이 이득을 보기 위해 말을 팔았다기보다는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명나라에게 많은 액수의 돈을 받아낸 것에 가깝다는 것. 조선도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이 많이 나오는 땅이 아닌지라 자국에서 필요한 말조차 여진족에서 수입해서 썼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홍무제나 영락제는 명의 속국이지만 훗날 위협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조선을 견제도 할 겸, 어차피 자국에서는 생산이 제한적인 말도 살 겸 조선을 이용했고, 조선은 이 관계에서 돈이나 받으며 국방력 강화는 꿈도 못 꾸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말은 현대의 탱크나 기갑차 같은 전략자원이었고, 전근대 사회에선 생산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돈을 주고 소중한 전략 자원인 말을 받으며 속국이지만 후에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조선의 전력 약화를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략물자 생산 제한은 현대에도 존재한다.[34]
홍무제 이래 조명관계가 명 황제의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계승되어 선덕제 치세까지 지속됐다. 영락제는 1408년,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리 400여 개와 전국의 사리 454개를 강제로 수집해갔으며, # 1409년에는 조선에 최초로 처녀를 요구하여 선덕연간까지 5번이나 공녀를 요구했다. 이때문에 조선에서는 몇달에 걸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심지어 조선국왕이 직접 처녀를 간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처녀 외에도 환관 양성을 위해 12살에서 18살 가량의 화자를 총 15차례에 걸쳐 200여 명을 명에 바쳐야 했다. 영락 중반부터 황제의 독단적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던 관계는 점점 조선 견제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적 취향을 맞춰주는 풍토로 변해갔다. 때문에 공녀와 화자 외에도 조선의 해산물, 두부 요리사, 가무를 배운 소녀, 매, 스라소니 등을 꾸준하게 바쳐야 했다. 어느정도였냐면 조선이 정복활동을 벌여 4군6진을 설치하고 명과의 갈등을 우려하는 상황에서도 말년의 선덕제는 조선의 두부 요리사를 찾을 정도였다. 조선 조정과 한양, 평안도 백성들은 황제들의 개인적 취향과 그 요구를 전달해주는 탐욕스러운 환관들 때문에 상당한 곤혹을 치뤄야 했다.[35]
어린 나이의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무관심으로 조선은 더이상 황제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해 곤혹을 치룰 필요가 없어졌으며 때문에 의례적인 사신단만 종종 오가게 되자, 조명관계는 매우 안정화 됐다. 이제 명나라는 북경 인근의 조선을 자신들의 주요 속국으로 삼을 수 있었고,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수입하고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36].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도 이걸 노리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로 명나라에 칭신했으나, 다이묘들이 막부의 무역 선단을 사칭해서 몰래 조공하는 바람에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망했다(...).
상이 이르기를, …… "명년에 장차 세폐를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하니, 심열이 이르기를, "내년에는 그래도 백성들에게 징수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후에는 참으로 계속하기 어렵습니다."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1638년) 11월 6일 두번째 기사
게다가 명나라에 조공하는 건 명나라가 조공한 양에 못지않은 하사품을 주는, 일종의 교역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의 불만이 없었지만[37] 1637년 병자호란에서 인조 정권이 불과 50일도 안되어 항복하여 수립된 조청관계에서는 조명관계에서의 방물 외에 세폐(歲幣)가 추가되어 1263~81년 여몽관계와 같이 조공이 이원화 되었다. 방물과 달리 세폐는 청 측이 강제로 양을 책정했는데,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던 청은 매해 세폐미 1만 석을 바치게 했다. 물론 세폐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1639년 요동에는 기근이 벌어지자 대중국 약탈전을 준비하던 청은 조선에게 세폐미 1만 석 중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2,250석을 재차 요구했으며, 1640년에는 그 무렵 청에게 완전히 복속된 경흥 대안의 얀추(yancu) 지역의 천여 명의 둔전민들을 기근으로 부터 구제하기 위해 미곡 3,178석과 소 100여 마리 등을 보내고, 2년에 걸쳐 100여 곡 이상의 곡물을 지급하였다. 다만 그해 청은 세폐미를 1천 석으로 감면해주었으나, 2년 뒤 홍 타이지가 송산전투를 일으키면서 조선에게 그해(1642년)부터 1646년까지 바쳐야 할 쌀 5천 섬을 한달안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38]
1644년 명 중앙의 붕괴 이후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의 반란군을 축출하고 북경을 정복한 청은 입관과 함께 식량사정이 더욱 급해져서 소현세자를 통해 겨울 전에 5천 석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무려 20만 석을 요구했다가 10만 석으로 감면해주었다. 조선은 전국에서 300척의 배와 7천여 명의 인원을 모아 곡물을 지급해야 했다.[39] 이 대대적인 수탈은 1645년 청이 강남을 차지하자 2년 뒤 세폐미를 1백 석으로 감면해준 끝에 매듭을 지었지만,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조선의 조공 마련 비용은 호조 재정 규모를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보용책을 실시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백성들에게 결포를 걷어 엄청난 대민 폐해를 초래했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기까지 조청관계에서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국가재정상 연평균 전 20만 량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41] 이후에 조선은 훗날 청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조약들을 체결하고 내우외환에 빠지기 전까지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봤다. 물론 일부 대상들과 특정 상인층이 이득을 보았을 뿐, 정부 재정은 여전히 궁핍하였기 때문에 민생은 고통받았다. 19세기 초반부터 조공으로 인한 손실과 중국 및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저렴하고 우수한 질의 상품이 유입되고 동시에 일본자본의 침투가 시작되어 조선의 경제는 더욱 쇠퇴하기에 이른다.
1644년 명 중앙의 붕괴 이후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의 반란군을 축출하고 북경을 정복한 청은 입관과 함께 식량사정이 더욱 급해져서 소현세자를 통해 겨울 전에 5천 석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무려 20만 석을 요구했다가 10만 석으로 감면해주었다. 조선은 전국에서 300척의 배와 7천여 명의 인원을 모아 곡물을 지급해야 했다.[39] 이 대대적인 수탈은 1645년 청이 강남을 차지하자 2년 뒤 세폐미를 1백 석으로 감면해준 끝에 매듭을 지었지만,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조선의 조공 마련 비용은 호조 재정 규모를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보용책을 실시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백성들에게 결포를 걷어 엄청난 대민 폐해를 초래했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기까지 조청관계에서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국가재정상 연평균 전 20만 량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41] 이후에 조선은 훗날 청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조약들을 체결하고 내우외환에 빠지기 전까지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봤다. 물론 일부 대상들과 특정 상인층이 이득을 보았을 뿐, 정부 재정은 여전히 궁핍하였기 때문에 민생은 고통받았다. 19세기 초반부터 조공으로 인한 손실과 중국 및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저렴하고 우수한 질의 상품이 유입되고 동시에 일본자본의 침투가 시작되어 조선의 경제는 더욱 쇠퇴하기에 이른다.
3.4. 조공책봉의 정치적 성격 [편집]
조공책봉관계는 전근대 동아시아 일각에서 황제국에 칭신한 나라가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선물을 바치고,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관계로 국제무역과 결합하거나 종주국의 통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에 주목한 J. K. 페어뱅크(John K. Fairbank) 등 서구 학자들의 연구 이래 조공책봉관계는 항상 완성형이 마련되어 있던 시스템 내지는 체제로 설명되었으며, 더나아가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유럽의 조약체제와 양립할 수 없던 것으로 해석했다. 포스트 모던 시기에 식민지,[42]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신탁 이래 그 헤게모니에 놓였던 역사적 경험을 한 한국의 연구에서는,[43] 조공과 책봉으로 대표되는 원명청대 대륙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상호관계를 15세기 조선이 명에게 조공 횟수를 늘려달라고 요청한 것 등을 근거로 조공을 문화, 경제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 한반도가 경제적 실리를 취했음만 부각하고,[44][45]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주권을 부분적으로 행사한 몰다비아, 왈라키아, 이집트, 불가리아 등의 사례가 있음에도 조약체제상 속국을 실질적인 관계 내지는 식민지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여, 조공책봉관계에서 성립된 속국을 분리하고자 한다.[46]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일부 세력들은 종주국에 대한 조공에 주대 봉건제 이념을 투영했기 때문에[47] 마치 일원적인 체제를 연상케 하나, 같은 조공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 편차는 매우 커서 의례나 그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모든 조공국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11세기 초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거란의 유화책에 응하여 조공을 이행한 고려 전기, 원종이 쿠빌라이 카안에게 칭신하고 고려가 점차 몽골제국의 속령이 되어갔던 고려 후기, 1637년 병자호란에서 결국 패전하고 삼전도의 항복을 치뤄 칭신하게 된 조선 후기의 조공의 수량과 정치적 성격은 모두 비교할 수 없다. 외형적으로 모두 조공 행위로 표현되었지만 시스템이나 체제로 설명할 만큼 도식화된 적이 없는 것이다.[49]
조공 뿐만 아니라 책봉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새로운 군주와 창업 군주는 권서국사, 권지국사, 권리국사 등을 자처하며 책봉을 청하는데, 한국사에서는 고려의 건국 시조였던 왕건이 후당에 먼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를 자칭하고 책봉을 청하여 명분상으로는 상하관계임을 나타내고 5년 뒤 책봉을 받아 의례상 군신관계를 수립한 것을 시초로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지위를 활용했다. 이는 책봉을 받지 못한 군주는 외교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50] 이후 이러한 책봉 방식은 왕건의 사후에도 그 후계자들인 혜종, 성종, 정종, 숙종 또한 그대로 따르면서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 시조였던 이성계의 경우는 홍무제가 사실상 조선국왕의 위상을 인정했음에도 정식 책봉이 없었다는 이유로 관문서식 외교문서에서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 등을 자처하는데 그쳤다.[52] 이러한 조심스러운 행보는 명 황제권이 여말선초 정치 세력들이 스스로의 정당성 내지는 명분을 제공해주는 정치적 권위로 기능했기 때문이다.[53] 명에 고명과 인신을 청하여 왕실과 국가의 통치권력 및 질서를 인정받으려는 이성계는 끝끝내 책봉을 받지 못하여, 아들 이방원에게 왕권에 도전받는 결정적 약점을 제공하였다.[54] 이성계 뿐만 아니라 중종, 광해군, 인조 등의 책봉이 거부된 적이 있으며, 5차례에 걸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도 거절당한 바 있다. 이는 내정간섭으로 볼 수 있으며, 즉위의 최종 절차에 있어서 명 황제의 책봉이 불가결한 존재임을 드러낸다.[55]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로 이는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원나라 황제)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고려 국내의 정치, 의례에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정간섭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원 복속기에 들어 몽골 황제권이 고려 내정의 최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제로 권력 행사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였고, 고려국왕이 황제권으로부터 체포, 심문, 유배, 폐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충선왕과 충혜왕의 사례가 있다.)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 또한 제후국제로 격하됐으며 더나아가 정동행성을 매개로 각종 외로 아문 의례가 고려에 적용되었다.[56] 가령 충렬왕대부터 짐(朕)을 칭하고 조(詔)나 칙(勅)을 내리지 못하게 된 것이나, # 충선왕이 복위 직후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고, # 선대왕들의 시호를 요청하여 원의 황제로부터 받은 것, # ‘외국지주’라는 이유로 로(路)의 조사(詔使) 영접 의례를 적용한 것, # 기존의 책봉문서와는 달리 일종의 관직 임명장으로서 선명(宣命)을 부여받은 것, # 마지막으로 공민왕 이전까지 충(忠)자돌림 시호만 계속해서 받은 것 # 등이 대표적이다.[57]
이렇듯 원 복속기에 들어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은 격하됐으며, 반원개혁 이후에도 제후국제로 귀착했고, 조선 초기를 경과하면서 고려 전기 국내적으로 제후 위상이 유명무실했던 것과 달리 내향적, 자기 신념적으로도 제후의 명분을 국내적으로 견지하게 됐다. 이는 군주와 신료들의 자기정체성 설정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며,[58] 이러한 배경에는 쿠빌라이 칸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제질서를 확립하고 고려가 몽골에 복속된 이래, 북경의 지근거리에 있어 원명청의 패권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경우에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내륙아시아와 달리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조공책봉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볼 수 없다.[59]
결국 보편적인 조공무역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서구의 속국관계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는 성급한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적어도 원 간섭기 이래 한반도의 조공은 특이한 형태였던 것이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연을 가진 몽골복속기 당시의 고려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복속(subjugation)'이나 '속령(colony)'으로 평가되기도 하며,[60] 청대 조선 또한, 청이 홍 타이지의 시대에 무력 행사로 굴복시키고 1653년부터 명의 조공국이 칭신하기 전까지 조선과 명확한 위계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의례를 활용한 면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선이 다른 속국 및 조공국들과 달리 특수한 위치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61]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이 다른 속국들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지 복속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조선은 몽골 복속기 당시 몽골 황제권이 실제권력을 행사한 고려의 상황과도 분명한 질적 차이를 보였다.[62]
1653년 유구가 칭신하기 전까지 조선국왕은 만주문자만 새겨진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외교 부분에 있어 호부의 역할이 막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례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63] 의례가 미미하였던 반면, 조공의 수량에 있어서 조선은 막대한 양의 곡물을 명대에는 없던 '세폐'라는 명목으로 수탈당했으며,[64] 조선국왕은 최소한 18세기까지 외번 몽골 왕공 등에게 시행하던 "은을 거두는(weile gaimbi)" 법적처벌을 제한적으로나마 적용받았다.[65] 이외에도 청은 여타의 속국들과 달리 조선에 차견하는 칙사에 대해서는 기인(旗人) 출신의 3품 이상 문무 고관이라는 조건을 고수했으며, 강희연간 《황여전람도》나 《황청지리총도》 그리고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 등에는 다른 속국들과 달리 조선만 청의 영역에 포함되거나, 만한합벽[66] 지도임에도 조선 지명들을 만주어로 표기하는 관행을 엿볼 수 있다.[67]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되면서 고려 전기까지의 조공책봉 관계와 달리 원 간섭기 이후로는 강력한 속국관계가 구축되고 그것이 원명청대에 연속되지만[68] 이렇게 다양한 면모들과 변용을 거쳤다. 따라서 1865년 프랑스 공사 베르테미(Jule Berthemy)가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여권을 발급해주고 조선에 이를 통지할 것을 요청하자, 청의 총리아문이 "조선은 단지 정삭을 받들고 해마다 조공해왔을 뿐이며, 이 나라가 카톨릭을 수용하기를 원할 것을 중국이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에 행문(行文)하기 어렵다"고 한 것을 중국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가 "조선은 중국에 공물을 바치지만 일체의 국사는 자주(自主)해왔으며, 따라서 톈진조약에도 기재하지 않았다"로 해석한 것을 두고,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을 가지면서도 양상과 성격을 달리하고 불가피성을 띄기도 하는 조공책봉관계[69]의 불간섭 성격이라 규정하는 것은 총리아문의 의도적인 언설을 오독한 것이다.[70][71]
한편 보편적인 조공관계를 한국사에 적용하여 서구의 속국과는 당연히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는 성급한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프랑스는 청대 조선의 역사적 지위를 속국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어떤 '근대적'인 무언가가 아닌 조공과 책봉을 핵심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공관 프랑스 정부위원(Commissa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플랑시(V. Collin de Plancy)는 조선이 매년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 외에 조선국왕에게 부여된 종속(dépendance)의 실체를 확인한 것으로 1890년 10월 28일 청 사신들의 신정왕후 조씨 조문 당시 고종의 봉건적 의례 수행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꼽았다. #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전한 청은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한 뒤, 1845년 벨처가 이끄는 사마랑호(Samarang)가 약 7주간이나 조선 해안을 측량하자 조선 조정은 북경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인신무외교의 법도와 지정학적 중요성을 들어 난징조약에서 개항된 다섯 항구 외에 교역이 금지되는 항구[禁斷之地]에 자국을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며, 도광제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흠차대신 키옝(Kiyeng, 耆英)에게 영국인들이 조선 해안에 접근하거나 상륙하지 말 것을 설득하라고 명령했다.[72] 《만국공법(萬國公法)》이 한역된 것이 1864년이라는 점을 볼 때 도광제나 조선 조정 모두 조약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실했을 것이 자명한데, 양측이 난징조약에 조선에 적용하고자 했던 것은 당대 조공책봉관계가 서양의 조약체제와 상응할 수 있는 것임을 반증한다. 실제로 《만국공법》상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 속국(Dependent State), 진공국(Tributary State), 봉신국(Vassal State)은 《흠정대청회통(欽定大淸會通, Hesei toktobuha daicing gurun i uheri kooli bithe)》상에서 칙봉(勅封)을 받아[Vassal] 조공(Tributary)을 행하는 조공의 나라(朝貢之國)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조선국왕이 청 황제의 책봉을 받지 않고 조공 및 봉삭을 의무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움으로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73][74]
단,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조공-책봉 관계가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달리 조선이 명이나 청에게 정치적・영토적 주권을 상실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되면서 형성된 원명청대 대륙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상호관계는 그 속에서도 그 성격 편차는 매우 커서 의례나 그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모든 시기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몽골지배층의 대고려 인식이 ‘속국’에서 ‘속령’으로 변모[76]했는데 반해 명나라 사람과 조선 사람들은 모두 조선을 외국(外國)으로 인식한 사실 등이 그 좋은 예이다.[77][78] 결국 조선이 외국으로 간주되며 조공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자체적으로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79]
물론, 18세기에 편찬된 明史 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초고가 일단락 된 淸史稿 에서는 조선을 ‘속국’으로 분류했다.[80] 이는 조선의 위상이 명・조선 관계에서보다 청・조선 관계에서 더 격하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는 1920년대 당시에는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이미 서양의 萬國公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국공법의 ‘vassal state’를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번역해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었다.[81]
다른 말로, 이전부터 널리 쓰이던 속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아편전쟁(1839-1842)이후 만국공법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또한 1882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로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8세기에 편찬된 '명사'에 조선이 외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청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며, 1920년대에 급조된 청사고에서 조선이 속국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과거의 조선을 그렇게 소급해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만국공법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미가 서양의 근대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와 같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실제로, 개항(1876) 이전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82]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일부 세력들은 종주국에 대한 조공에 주대 봉건제 이념을 투영했기 때문에[47] 마치 일원적인 체제를 연상케 하나, 같은 조공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 편차는 매우 커서 의례나 그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모든 조공국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11세기 초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거란의 유화책에 응하여 조공을 이행한 고려 전기, 원종이 쿠빌라이 카안에게 칭신하고 고려가 점차 몽골제국의 속령이 되어갔던 고려 후기, 1637년 병자호란에서 결국 패전하고 삼전도의 항복을 치뤄 칭신하게 된 조선 후기의 조공의 수량과 정치적 성격은 모두 비교할 수 없다. 외형적으로 모두 조공 행위로 표현되었지만 시스템이나 체제로 설명할 만큼 도식화된 적이 없는 것이다.[49]
조공 뿐만 아니라 책봉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새로운 군주와 창업 군주는 권서국사, 권지국사, 권리국사 등을 자처하며 책봉을 청하는데, 한국사에서는 고려의 건국 시조였던 왕건이 후당에 먼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를 자칭하고 책봉을 청하여 명분상으로는 상하관계임을 나타내고 5년 뒤 책봉을 받아 의례상 군신관계를 수립한 것을 시초로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지위를 활용했다. 이는 책봉을 받지 못한 군주는 외교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50] 이후 이러한 책봉 방식은 왕건의 사후에도 그 후계자들인 혜종, 성종, 정종, 숙종 또한 그대로 따르면서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 시조였던 이성계의 경우는 홍무제가 사실상 조선국왕의 위상을 인정했음에도 정식 책봉이 없었다는 이유로 관문서식 외교문서에서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 등을 자처하는데 그쳤다.[52] 이러한 조심스러운 행보는 명 황제권이 여말선초 정치 세력들이 스스로의 정당성 내지는 명분을 제공해주는 정치적 권위로 기능했기 때문이다.[53] 명에 고명과 인신을 청하여 왕실과 국가의 통치권력 및 질서를 인정받으려는 이성계는 끝끝내 책봉을 받지 못하여, 아들 이방원에게 왕권에 도전받는 결정적 약점을 제공하였다.[54] 이성계 뿐만 아니라 중종, 광해군, 인조 등의 책봉이 거부된 적이 있으며, 5차례에 걸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도 거절당한 바 있다. 이는 내정간섭으로 볼 수 있으며, 즉위의 최종 절차에 있어서 명 황제의 책봉이 불가결한 존재임을 드러낸다.[55]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로 이는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원나라 황제)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고려 국내의 정치, 의례에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정간섭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원 복속기에 들어 몽골 황제권이 고려 내정의 최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제로 권력 행사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였고, 고려국왕이 황제권으로부터 체포, 심문, 유배, 폐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충선왕과 충혜왕의 사례가 있다.)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 또한 제후국제로 격하됐으며 더나아가 정동행성을 매개로 각종 외로 아문 의례가 고려에 적용되었다.[56] 가령 충렬왕대부터 짐(朕)을 칭하고 조(詔)나 칙(勅)을 내리지 못하게 된 것이나, # 충선왕이 복위 직후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고, # 선대왕들의 시호를 요청하여 원의 황제로부터 받은 것, # ‘외국지주’라는 이유로 로(路)의 조사(詔使) 영접 의례를 적용한 것, # 기존의 책봉문서와는 달리 일종의 관직 임명장으로서 선명(宣命)을 부여받은 것, # 마지막으로 공민왕 이전까지 충(忠)자돌림 시호만 계속해서 받은 것 # 등이 대표적이다.[57]
이렇듯 원 복속기에 들어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은 격하됐으며, 반원개혁 이후에도 제후국제로 귀착했고, 조선 초기를 경과하면서 고려 전기 국내적으로 제후 위상이 유명무실했던 것과 달리 내향적, 자기 신념적으로도 제후의 명분을 국내적으로 견지하게 됐다. 이는 군주와 신료들의 자기정체성 설정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며,[58] 이러한 배경에는 쿠빌라이 칸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제질서를 확립하고 고려가 몽골에 복속된 이래, 북경의 지근거리에 있어 원명청의 패권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경우에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내륙아시아와 달리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조공책봉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볼 수 없다.[59]
결국 보편적인 조공무역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서구의 속국관계와는 당연히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는 성급한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적어도 원 간섭기 이래 한반도의 조공은 특이한 형태였던 것이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연을 가진 몽골복속기 당시의 고려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복속(subjugation)'이나 '속령(colony)'으로 평가되기도 하며,[60] 청대 조선 또한, 청이 홍 타이지의 시대에 무력 행사로 굴복시키고 1653년부터 명의 조공국이 칭신하기 전까지 조선과 명확한 위계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의례를 활용한 면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선이 다른 속국 및 조공국들과 달리 특수한 위치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61]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이 다른 속국들과는 다른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지 복속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조선은 몽골 복속기 당시 몽골 황제권이 실제권력을 행사한 고려의 상황과도 분명한 질적 차이를 보였다.[62]
1653년 유구가 칭신하기 전까지 조선국왕은 만주문자만 새겨진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외교 부분에 있어 호부의 역할이 막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례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63] 의례가 미미하였던 반면, 조공의 수량에 있어서 조선은 막대한 양의 곡물을 명대에는 없던 '세폐'라는 명목으로 수탈당했으며,[64] 조선국왕은 최소한 18세기까지 외번 몽골 왕공 등에게 시행하던 "은을 거두는(weile gaimbi)" 법적처벌을 제한적으로나마 적용받았다.[65] 이외에도 청은 여타의 속국들과 달리 조선에 차견하는 칙사에 대해서는 기인(旗人) 출신의 3품 이상 문무 고관이라는 조건을 고수했으며, 강희연간 《황여전람도》나 《황청지리총도》 그리고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 등에는 다른 속국들과 달리 조선만 청의 영역에 포함되거나, 만한합벽[66] 지도임에도 조선 지명들을 만주어로 표기하는 관행을 엿볼 수 있다.[67]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되면서 고려 전기까지의 조공책봉 관계와 달리 원 간섭기 이후로는 강력한 속국관계가 구축되고 그것이 원명청대에 연속되지만[68] 이렇게 다양한 면모들과 변용을 거쳤다. 따라서 1865년 프랑스 공사 베르테미(Jule Berthemy)가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여권을 발급해주고 조선에 이를 통지할 것을 요청하자, 청의 총리아문이 "조선은 단지 정삭을 받들고 해마다 조공해왔을 뿐이며, 이 나라가 카톨릭을 수용하기를 원할 것을 중국이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에 행문(行文)하기 어렵다"고 한 것을 중국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가 "조선은 중국에 공물을 바치지만 일체의 국사는 자주(自主)해왔으며, 따라서 톈진조약에도 기재하지 않았다"로 해석한 것을 두고,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을 가지면서도 양상과 성격을 달리하고 불가피성을 띄기도 하는 조공책봉관계[69]의 불간섭 성격이라 규정하는 것은 총리아문의 의도적인 언설을 오독한 것이다.[70][71]
한편 보편적인 조공관계를 한국사에 적용하여 서구의 속국과는 당연히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는 성급한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프랑스는 청대 조선의 역사적 지위를 속국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어떤 '근대적'인 무언가가 아닌 조공과 책봉을 핵심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공관 프랑스 정부위원(Commissa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플랑시(V. Collin de Plancy)는 조선이 매년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 외에 조선국왕에게 부여된 종속(dépendance)의 실체를 확인한 것으로 1890년 10월 28일 청 사신들의 신정왕후 조씨 조문 당시 고종의 봉건적 의례 수행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꼽았다. #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전한 청은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한 뒤, 1845년 벨처가 이끄는 사마랑호(Samarang)가 약 7주간이나 조선 해안을 측량하자 조선 조정은 북경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인신무외교의 법도와 지정학적 중요성을 들어 난징조약에서 개항된 다섯 항구 외에 교역이 금지되는 항구[禁斷之地]에 자국을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며, 도광제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흠차대신 키옝(Kiyeng, 耆英)에게 영국인들이 조선 해안에 접근하거나 상륙하지 말 것을 설득하라고 명령했다.[72] 《만국공법(萬國公法)》이 한역된 것이 1864년이라는 점을 볼 때 도광제나 조선 조정 모두 조약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실했을 것이 자명한데, 양측이 난징조약에 조선에 적용하고자 했던 것은 당대 조공책봉관계가 서양의 조약체제와 상응할 수 있는 것임을 반증한다. 실제로 《만국공법》상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 속국(Dependent State), 진공국(Tributary State), 봉신국(Vassal State)은 《흠정대청회통(欽定大淸會通, Hesei toktobuha daicing gurun i uheri kooli bithe)》상에서 칙봉(勅封)을 받아[Vassal] 조공(Tributary)을 행하는 조공의 나라(朝貢之國)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조선국왕이 청 황제의 책봉을 받지 않고 조공 및 봉삭을 의무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움으로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73][74]
단,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조공-책봉 관계가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달리 조선이 명이나 청에게 정치적・영토적 주권을 상실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되면서 형성된 원명청대 대륙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상호관계는 그 속에서도 그 성격 편차는 매우 커서 의례나 그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모든 시기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몽골지배층의 대고려 인식이 ‘속국’에서 ‘속령’으로 변모[76]했는데 반해 명나라 사람과 조선 사람들은 모두 조선을 외국(外國)으로 인식한 사실 등이 그 좋은 예이다.[77][78] 결국 조선이 외국으로 간주되며 조공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자체적으로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79]
물론, 18세기에 편찬된 明史 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초고가 일단락 된 淸史稿 에서는 조선을 ‘속국’으로 분류했다.[80] 이는 조선의 위상이 명・조선 관계에서보다 청・조선 관계에서 더 격하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는 1920년대 당시에는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이미 서양의 萬國公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국공법의 ‘vassal state’를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번역해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었다.[81]
다른 말로, 이전부터 널리 쓰이던 속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아편전쟁(1839-1842)이후 만국공법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또한 1882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로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8세기에 편찬된 '명사'에 조선이 외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청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며, 1920년대에 급조된 청사고에서 조선이 속국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과거의 조선을 그렇게 소급해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만국공법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미가 서양의 근대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와 같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실제로, 개항(1876) 이전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82]
4. 같이 보기 [편집]
[1] 새해 첫날 제후국왕이 천자가 새로운 해의 달력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치르던 의식이다.[2] 그런데 소동파는 더 나은 나라들도 있는데 송나라가 고려에 너무 지나친 대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만을 가져서 좀 감정적으로 극딜한 면이 있고 고려 역시 친송정책과 함께 거란 때문이니 하는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딱히 무례하게 마구 행동하고 다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가 송나라와 꽤 오래 교류가 없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다 다시 조공하러 왔을 때도 송나라에서 그 진의을 물으니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에 견디지 못한 국왕 왕휘는 늘 화엄경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라며 거란의 탓으로 돌렸다. 송나라 입장에서 거란과 양다리 걸치고 있는 현장을 봤을 때에도 사실은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을 하여 송나라 황제가 진의를 조사하기 위해 고려 사신을 부른 적도 있었는데 당시 태도도 무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냥 양다리 걸친 게 아니꼬왔던 거지.(이것도 그럴만한게 송은 주변국들의 압박에 많이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 고려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3]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4] 가톨릭의 경우는 교황의 영향 하에, 정교회는 로마를 제외한 5대교구의 나머지 총대주교나, 각국의 총대주교의 영향 하에 있다는 전제로 군주나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개신교의 경우도 자국에서 국교로 지정한 종파의 수장이 나라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군주나 정치인들의 세속적인 권력을 뒷받침하였다.[5] 성경에도 나오는 헤롯 왕이 대표적이다.[6] 공식적으로는 볼모 신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제국을 방문한 귀빈 겸 유학생으로 간주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로마의 속국이나 위성국의 유력자들이 볼모로 보내지는 것을 선망하는 경우가 많았다.[7]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주연으로 출연도 한 영화인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옆집에 살던 동양인 가족과 동양계 갱스터들이 바로 몽족이다. 참고로 중국에 사는 몽족은 따로 묘족이라고도 하는데, 몽족의 한 일파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하기도 한다.[8] 그나마 오나라는 그 왕실이 주나라 왕실의 방계인 만큼, 당대 중국의 정세에 개입할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초나라나 월나라는 왕실이 한족계가 아닌 현지 원주민계이며, 따라서 주나라 왕실과는 아무 연관도 없어서 중화권의 정세에 개입할 명분도 없었고, 때문에 주나라에 칭신하는 것도 한동안 허락되지 않았다. 더욱이 초장왕이 주나라의 왕이 전통적으로 제사에 사용했던 솥인 구정의 무게에 대해 물어보는 말로 에둘러서, 여차하면 주 왕실의 지위를 찬탈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자, 주나라와 그 제후국들에게 어그로가 끌렸으니 더더욱 제후국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9] 주나라의 소왕이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3번이나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특히 3번째 원정에서는 소왕 본인이 초나라를 정벌하러가는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죽는 참사가 벌어졌다.[10] 물론 당대의 비 한족계 국가는 초나라나 오나라, 월나라 이외에도 중산국을 비롯해 몇 군데 더 있었다. 개중 지금의 장쑤성 일대에 있었던 서나라는 초나라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중원 지역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서, 대놓고 칭왕하고 주나라에 개기기도 했다. 비록 중국 정복에 대한 꿈은 서나라가 오나라에 패망하면서,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11] 요즘으로 치면, 중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각종 물품을 수입해오는데, 이 대금을 미국 달러로 지불하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중국에 외화가 유출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12] 이는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던 탓이 크다. 그래서 종래의 불평등한 조공-책봉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무역하는 것만 인정받았을뿐, 명목상 조선에게 칭신하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안좋은 위치에서 국교를 맺게 되었다.[13] 원래 천황의 어원은 중국 당나라의 황제를 칭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그 이전 왜는 조선처럼 '대왕大王'이라 쓰고 '오오키미'라고 읽었다.[14] 춘추전국시대나 오대십국시대의 중국 왕조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15] 그래서 원래는 타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천황을 대왜왕이라고 칭할 만큼, 왜라는 국호는 일본인들이 거리낌없이 쓰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으며, 바뀐 국호인 일본이 더 자존심 상하는 국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쿠로후네 사건을 겪고 개화기에 이르렀을 때는 오히려 바뀐 국명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원래의 이름은 자국에 대한 멸칭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맺은 불평등 조약인 제물포 조약에서 왜관이라는 명칭을 일본관이라고 바꾸라는 조항이 들어가있기도 했다.[16] 지금 현재 우리가 먹는 그 감자가 아니다. 당시에 감자라는 말은 감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 북동부 해안에 잠시 도달한 것을 빼면, 유라시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도달한 적도 없던 시기에 그 구황작물 감자가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17] 예를 들어 1401년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면서 명과의 교류를 시작한 아시카가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에게 계속 청원하여 1404년 감합 무역을 허가받았는데,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1523년에는 쇠퇴한 아시카가 막부를 대신하여 감합무역을 독점하던 오우치씨와 호소카와씨가 서로 패싸움을 벌이고 명의 관리들까지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닝보의 난이라고 한다.[18] 이명미(2016), "몽골황제권의 작용과 고려국왕의 사법적 위상 변화",《동국사학》 60; (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 최종석(2019), "고려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민족문화연구》 85.[19] 참고로 조선초 전국의 사육소는 2~3만여 마리[20] 고작 소 1마리 당 비단 4필에 교환된 것이다.[21] 고려 시대 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던 관리[22] 보통 쌀 1석은 성인 한 사람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144kg에 해당한다.[23]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거두어 들이는 미곡[24] 1두는 성인 한 명이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양[25] 실제로는 카이두(海都)와의 전쟁을 위한 전비 확충이 목적이었다.[26] 유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 18, 1957, 34∼37쪽[27]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28] 몽골에 귀부한 남송군[29] 몽골은 병사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30] 원나라가 요구하는 매의 포획과 사육을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두었던 관청[31] 고려시대 권문세족 중 한명으로 충렬왕의 몽골인 아내 제국대장공주와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32] 정동훈(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보》 134.[33] 수량에 맞춰서 말을 갑작스럽게 준비하느라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고 여진족과 무역으로 죄다 보충했으면 몰라도 직접 말을 준비하는 경우에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34] 당장 핵무기 생산이나 원자력 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및 이를 재처리하는 기술의 유통이나 매매, 보유에 대해 세계 각국에 강력한 규제를 걸어두고 이를 IAEA를 통해 감시하는 걸 생각하면 쉽다. 좀더 옛날 얘기로 가자면, 1930년에 있었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세계 각국의 군함 생산량과 보유량을 통제한 것도 명나라가 조선을 포함한 주변국에 군수물자로 쓰일 말을 사간 것과 비견될 수 있다.[35] 정동훈(2020), "正統帝의 등극과 조선-명관계의 큰 변화", 《한국문화》 90.[36] 당장, 명나라가 자국에 팔 물목으로 말을 요구하는 통에 대규모의 기병을 운용할 수 없자, '말이 없으면 대포를 만들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대포를 포함한 각종 화약 무기의 생산에 주력하여, 현대의 대한민국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고의 화력덕후 국가가 되었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으로 얻은 재력이 바탕이 되었다.[37] 그리고 이게 사실 불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게 뭐냐면 전적으로 주변의 여진 부족들이나 조선이 남는 장사였다. 명에게 있어 조공은 부모로서의 위상을 인정받기 위해 받는 것이기에 조선이나 여진 부족 등이 바치는 조공보다는 하사품을 더 많이 주는 것이 외교적 관례였다. 그래서 조선이 거의 조공을 바치면 이문을 남겨 왔다. 공무역은 조선에게 여러 모로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38]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38~342.[39] 뱃사공들이 일부로 배를 전복시키거나 조난당하면서 북경에 지급된 세폐미는 3만 6천여 석에 불과했다.그런데도 너무 많다[40]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42~346; 홍선이(2014), "歲幣 方物을 통해 본 朝淸관계의 특징 -인조대 歲幣 方物의 구성과 재정 부담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5.[41] 전해종(1970),《한중관계사 연구》, p. 98~99.[42] 계승범(2009), "조선시대 동아시아 질서와 한중관계–쟁점별 분석과 이해",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p. 135.[43] 정다함(2011), "’사대事大’와 ‘교린交隣’과 ‘소중화小中華’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한국사학보》 42.[44] 그것은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뿐만 아니라 내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등을 아우르는 '인도양 교역 네트워크'의 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팍스 몽골리카의 교역체제를 일정부분 계승한 명이 15세기 급등한 교역 에너지에 당황하여 조공의 사절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한 것이 그 계기가 됐다. (한지선(2020), "15세기 명・티무르제국 간의 조공무역과 인도양 교역 네트워크 ― 중국 문헌자료에 나타난 세계화의 단상 ―", 《明淸史硏究》 54.)[45] 일례로 한국인들이 조선과는 달리 명에게 종속 혹은 더나아가 지배를 받았다고 인식하는 건주여진도 조선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명과 교역을 늘렸고 이에 접대비용 측면에서 부담을 느낀 명은 1464년 10월에 건주삼위, 모련위, 해서 제위(諸衛)의 조공을 축소, 제한했다. 이듬해 이 조치가 시행되자 모련위의 부족들은 크게 반발하여 수년에 걸쳐 요동을 노략했으며, 인근의 여진 부족들도 이에 가담하기도 했다. (박정민(2015), "15세기 후반 建州女眞의 생존 전략 - 조ㆍ명 연합군의 정벌과 영향을 중심으로 -", 《明淸史硏究》 44.) [46]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8, 24, 43, 321~322, 379.[47] 조선사 연구자인 정다함은 '사대의 기원에 대한 접근을 바탕으로 그것이 한국사에서의 특수한 관행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정체성론과 연결시켰던 식민사관이나 이를 형식적 관행을 통해 국익과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파악하는 민족주의사관에 빠질 수밖에 매우 위함한 본질주의적 접근방식이라고 비판한다.[83][48] 정다함(2011), "’사대事大’와 ‘교린交隣’과 ‘소중화小中華’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한국사학보》 42.[49] 한지선(2019), "印度洋 貿易 네트워크 상에서의 朝貢과 互市 ― 明代 미얀마에서의 土司制度와 國境貿易 ―", 《명청사연구》 52, p. 27; 정동훈(2020), "고종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 《한국중세사연구》 61, p. 1~2; (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보》 134.[50] 11~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하에 거란과 송의 황제가 대등한 지위를 상호 인정하고, 고려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의 군주가 외적으로 제후에 가까운 위상에 위치하여 위계질서 형식을 갖춘 것은 사실이나, 원명대와 같이 필요와 선택에 따른 조공과 책봉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원적, 체계적 질서는 아니었다. 즉, 고려 역시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중요한 행위자로서 참여했던 것이다.[84][51] 계승범(2010),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p. 260; 정동훈(2016), "高麗時代 外交文書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47~148.[52] 정동훈(2016), "高麗時代 外交文書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44~46, 534~536.[53]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54] 정다함(2017), "朝鮮 太祖代 遼東 공격 시도에 대한 재해석", 《역사와 담론》 84, p. 150~152.[55] 계승범(2009), "조선시대 동아시아 질서와 한중관계–쟁점별 분석과 이해",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p. 136~137.[56] 이명미(2016), "몽골황제권의 작용과 고려국왕의 사법적 위상 변화",《동국사학》 60; (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 최종석(2019), "고려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민족문화연구》 85.[57] 이명미(2012), "고려-몽골 관계와 고려국왕 위상의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149; 정동훈(2012), "명대 예제질서에서 조선국왕의 위상", 《역사와 현실》 84, p. 285; (2015), "고려시대 사신 영접 의례의 변동과 국가 위상", 《역사와 현실》 98;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 《역사와 현실》 113, p. 350~357.[58]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 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59] 계승범(2010),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60]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61] 岩井茂樹(2007), "淸代の互市と “沈默外交”, 《中國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硏究》, p. 384; 유장근(2009), "‘만청 식민주의’를 둘러싼 중ㆍ외 학계의 논의", 《중국 역사학계의 청사연구 동향》, p. 229; 손성욱(2019), "종번(宗藩)과 중화(中華)로 청제국을 볼 수 있는가 - 왕위안총 ‘조선 모델’의 가능성과 한계", 《동북아역사논총》 66, p. 19.[62] 궁극적으로 청이 조선을 外藩(tulergi golo)과 구분되는 별개의 국가로, 조선국왕을 일국의 군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 이렇듯 외번몽고와 달리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던 淸代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은 征東行省丞相⋅駙馬⋅高麗國王이라는 복합적 위상을 가지면서 국내에서도 몽골 황제권에 의해 그 권한이 상대화되어 있었던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의 법적 위상과도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 p. 439.)[63] 손성욱(2019), "종번(宗藩)과 중화(中華)로 청제국을 볼 수 있는가 - 왕위안총 ‘조선 모델’의 가능성과 한계", 《동북아역사논총》 66, p. 19~20.[64] 홍선이(2014), "歲幣 方物을 통해 본 朝淸관계의 특징 -인조대 歲幣 方物의 구성과 재정 부담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5.[65]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66] 滿漢合璧. 만주어와 한문을 병기하는 표기 체계를 뜻한다.[67] 구범진(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68]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 p. 34; 정동훈(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專有) -, 《역사와 현실》 113.[69] 고명수(2017), "즉위 초 쿠빌라이의 고려정책 ― 그의 漢法 수용 문제와 관련하여 ―를 두고", 《東洋史學硏究》 141;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333~334.[70]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71] 이 교수는 조공책봉관계가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관계였음을 강조하고, 나아가 그것이 무역관계였다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토론자는 이 교수가 말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관계의 성격이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관계가 근대 국제관계와 비교했을 때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조약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가와 시기에 따라 그 관계의 성격이 달라진다. 이 교수는 청 정부가 조선의 정책에 간섭한 것은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배운 결과라고 하였다. 사실 조공책봉관계는 명확한 조약이라는 기초가 없고, 간섭/불간섭은 관계에 의한 것이지 조약에 의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 대신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자던 최초의 주장도 원조(元朝)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지 서양의 예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王元周(2009), "「조선중화주의에서 한청조약까지 -근대적 한중관계의 성립」에 대한 토론", 《동북아 관계사의 성격 : 동북아역사재단·베이징대학 공동 학술회의》, p. 289.)[72]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73]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박사논문, p. 4, 36~38.[74] 명대의 경우에도 이성계, 중종, 광해군, 인조 등의 책봉이 거부된 적이 있으며, 5차례에 걸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도 거절당한 바 있다. 이는 내정간섭으로 볼 수 있으며, 즉위의 최종 절차에 있어서 명 황제의 책봉이 불가결한 존재임을 드러낸다.[85] 그럼에도 계승범은 조선이 외국으로 간주되며 조공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자체적으로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64~68)[75] 계승범(2009), "조선시대 동아시아 질서와 한중관계–쟁점별 분석과 이해",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p. 136~137.[76] 고명수(2020),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77]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78] 조선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은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일부를 전거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중종실록 24년 10월 18일 경진, 26일 무자, 27일 기축; 37년 11월 24일 경오; 숙종실록 35권 27년 3월 29일 병진; 경종수정실록 3권 2년 3월26일 신해; 영조실록 1권 즉위년 9월 1일 신축 등.[79] 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64~68[80] 최소자, 淸과 朝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서울: 혜안, 2005), 180-183.[81] 개항 이후 청의 내정 간섭 시기에 속국의 개념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 조공과 책봉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구선희,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참조.[82]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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