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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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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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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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 2세대 트로이카이자 70~80년대 최고의 영화 흥행 여배우로 유명하다.
정윤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7] 미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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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 2세대 트로이카이자 70~80년대 최고의 영화 흥행 여배우로 유명하다.
정윤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7] 미혼.
2. 활동 [편집]
2.1. 데뷔 전 [편집]
2.2. 1970년대 [편집]
1975년 TBC(동양방송) 특채탤런트로 뽑혔다. 이듬해인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춘향' 역에 발탁되면서 영화에 데뷔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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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11]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수였으며, 이 기록은 1990년에 상영한 장군의 아들로 깨지게 된다. 뒤이어 속 별들의 고향, 순악질 여사 등이 흥행하게 되면서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잇는 여배우 신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에서도 정윤희와 함께 출연한 청실홍실[12], 비바람 찬이슬, 찔레꽃 등이 성공하며 77년 미녀배우 순위에 정윤희의 뒤를 이어 2위의 자리에 올랐다.[13] 그러나 아무래도 외모 면에서는 정윤희와 유지인이 더 예뻤기 때문에 이들이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된 이후로는 이들에게 약간 주춤한 모습을 보여줬다.그래도 탑3안에는 들었다.
파일:겨울여자 장면.png
이듬해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11]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수였으며, 이 기록은 1990년에 상영한 장군의 아들로 깨지게 된다. 뒤이어 속 별들의 고향, 순악질 여사 등이 흥행하게 되면서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잇는 여배우 신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에서도 정윤희와 함께 출연한 청실홍실[12], 비바람 찬이슬, 찔레꽃 등이 성공하며 77년 미녀배우 순위에 정윤희의 뒤를 이어 2위의 자리에 올랐다.[13] 그러나 아무래도 외모 면에서는 정윤희와 유지인이 더 예뻤기 때문에 이들이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된 이후로는 이들에게 약간 주춤한 모습을 보여줬다.
2.3. 1980년대 [편집]
파일:장태희.jpg
1980년 종합소득세 신고 납부액에서 8,850만 원을 신고하고 세금 1,700만 원을 납부했는데, 이는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이었다. 당시에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정윤희가 1,430만원을 신고하고 세금 400만 원을 납부한 것보다 액수가 훨씬 컸다.[14]
드라마 <아롱이 다롱이> 주연이 장미희로 낙점되었지만, 김수현 PD와의 갈등으로 촬영 하루 전에 장미희가 촬영을 취소해 김형자로 주연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취팔권 쌍팔권'에 출연하여 쿵후액션연기를 보여줬다. 4월 27일부터 9시에 만납시다의 MC로 출연하였으나 시청자의 반응이 영 별로라[15] 9월 19일부터 김보연이 진행자를 맡았다. 장미희는 방송에 하차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11월 21일에 어머니 최숙희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장미희의 은퇴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1982년 신군부 집권 시기에 출연금지 연예인 목록에 오르면서, 1984년까지 제대로 된 드라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 여파였는지 몰라도, 1982년에 여배우 수입 순위에서 정윤희와 유지인에 밀린 3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6] 단순히 방송금지 조치만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연기공부를 위해 1982년, 1983년 2번이나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도 장미희의 공백기를 심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공백기 때문에 정부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소문의 정점은 후술할 X양 사건(...).
그 대신 영화활동에 전념했는데, 주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애인 등의 멜로물에 출연을 하였다. 이러한 영화는 대박까지는 아니고 중박의 성적을 내었다.
파일:Screenshot_2018-02-04-11-13-12.png
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녀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배창호가 감독을 맡은 안성기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된다.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처녀 혹은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숙미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는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에로물이 범람해 영화가 전체적으로 야해지다 보니 깊고 푸른 밤이나 적도의 꽃에서 정사장면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깊고 푸른 밤의 성공은 장미희의 이미지 변신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렸고,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과 정윤희와는 달리 이후의 방송 활동에도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황진이에 출연하였지만, 장미희의 누드를 기대했던 관람객의 기대에 못 미쳐서 흥행에 실패[17]하였으나, 89년에 이덕화와 짝을 맞춘 '불의 나라'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종합소득세 신고 납부액에서 8,850만 원을 신고하고 세금 1,700만 원을 납부했는데, 이는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이었다. 당시에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정윤희가 1,430만원을 신고하고 세금 400만 원을 납부한 것보다 액수가 훨씬 컸다.[14]
드라마 <아롱이 다롱이> 주연이 장미희로 낙점되었지만, 김수현 PD와의 갈등으로 촬영 하루 전에 장미희가 촬영을 취소해 김형자로 주연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취팔권 쌍팔권'에 출연하여 쿵후액션연기를 보여줬다. 4월 27일부터 9시에 만납시다의 MC로 출연하였으나 시청자의 반응이 영 별로라[15] 9월 19일부터 김보연이 진행자를 맡았다. 장미희는 방송에 하차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11월 21일에 어머니 최숙희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장미희의 은퇴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1982년 신군부 집권 시기에 출연금지 연예인 목록에 오르면서, 1984년까지 제대로 된 드라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 여파였는지 몰라도, 1982년에 여배우 수입 순위에서 정윤희와 유지인에 밀린 3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6] 단순히 방송금지 조치만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연기공부를 위해 1982년, 1983년 2번이나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도 장미희의 공백기를 심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공백기 때문에 정부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소문의 정점은 후술할 X양 사건(...).
그 대신 영화활동에 전념했는데, 주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애인 등의 멜로물에 출연을 하였다. 이러한 영화는 대박까지는 아니고 중박의 성적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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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녀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배창호가 감독을 맡은 안성기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된다.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처녀 혹은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숙미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는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에로물이 범람해 영화가 전체적으로 야해지다 보니 깊고 푸른 밤이나 적도의 꽃에서 정사장면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 깊고 푸른 밤의 성공은 장미희의 이미지 변신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렸고,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과 정윤희와는 달리 이후의 방송 활동에도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황진이에 출연하였지만, 장미희의 누드를 기대했던 관람객의 기대에 못 미쳐서 흥행에 실패[17]하였으나, 89년에 이덕화와 짝을 맞춘 '불의 나라'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2.4. 1990년대 [편집]
2.5. 2000년대 이후 [편집]
이전과는 달리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보다는 드라마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우아한 사모님풍의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학력 위조 파동의 여파로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주로 사모님이나 귀부인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는 2세대 트로이카 중에선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80년대 이후 은퇴한 정윤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지인 역시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연기보단 종편 예능 위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18] 장미희는 2010년대 후반 들어서도 1년에 드라마 하나씩은 꼭 찍고 있다. 나이가 있다보니 주연급은 아니지만 비중 높은 조연이나 서브 주연 정도의 위치는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2세대 트로이카 중에선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80년대 이후 은퇴한 정윤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지인 역시 2010년대 중반 이후로 연기보단 종편 예능 위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18] 장미희는 2010년대 후반 들어서도 1년에 드라마 하나씩은 꼭 찍고 있다. 나이가 있다보니 주연급은 아니지만 비중 높은 조연이나 서브 주연 정도의 위치는 차지하고 있다.
3. 사건사고 [편집]
3.1. 스캔들 [편집]
3.1.1. 전두환 전 대통령 [편집]
X양 사건
장미희의 스캔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스캔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이 장미희를 아껴 내연녀로 삼자 이에 질투한 이순자가 드라마 길을 촬영하고 있던 장미희를 납치해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19],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가 있는 감방에 넣었다는 내용이다.
이 스캔들이 떠오른 때가 1980년대 초반대였는데, 이전에 활발한 활동을 보냈던 것과 달리 활동이 뜸했던 것이 소문을 키우는 데에 기여를 했다. 게다가 잦은 미국 유학도 이러한 스캔들이 퍼지는 데에 기여했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당시에 파장이 컸던지, 이를 영화화한 서울무지개가 1989년에 상영되어 큰 흥행을 이끌었던 적이 있다.
일단 장미희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노인들 중에서는 이 사건으로 장미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장미희의 스캔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스캔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이 장미희를 아껴 내연녀로 삼자 이에 질투한 이순자가 드라마 길을 촬영하고 있던 장미희를 납치해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19],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가 있는 감방에 넣었다는 내용이다.
이 스캔들이 떠오른 때가 1980년대 초반대였는데, 이전에 활발한 활동을 보냈던 것과 달리 활동이 뜸했던 것이 소문을 키우는 데에 기여를 했다. 게다가 잦은 미국 유학도 이러한 스캔들이 퍼지는 데에 기여했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당시에 파장이 컸던지, 이를 영화화한 서울무지개가 1989년에 상영되어 큰 흥행을 이끌었던 적이 있다.
일단 장미희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노인들 중에서는 이 사건으로 장미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3.1.2. 신기수 전 경남기업 사장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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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당시 경남기업 사장과 약혼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밀회를 가진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83년 당시 경남기업 사장과 약혼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밀회를 가진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3.1.3. 배창호 영화감독 [편집]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공개구혼을 한 적이 있다. 배창호가 무명 시절 우연히 장미희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았고, 이후 감독을 맡은 배창호가 오랜 기간 장미희와 짝을 맞추는 동안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연정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3.2. 학력 위조 [편집]
장충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미국 호손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국대학교 청강생에 불과했던 것. 신정아 학력 위조가 드러남에 따라 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인은 "할말이 없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올랐다. 학력위조 문서를 참조할 것.
그러나 의외로 장미희의 학력위조 경력은 더 있다. 그녀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협성여상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 졸업에 건국대 의상학과로 자신을 포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장미희 보고 여상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린 적도 일부 있었다고.
그러나 의외로 장미희의 학력위조 경력은 더 있다. 그녀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협성여상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 졸업에 건국대 의상학과로 자신을 포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장미희 보고 여상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린 적도 일부 있었다고.
4. 여담 [편집]
배우 본인의 고고하고 우아한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20] 어떤 작품에 출연해도 배역 자체를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홀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어야 할 드라마 '육남매'[21]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약간이나마 나올 지경. 장미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연기 생활이 40년 가까이 되는데도 연기의 변화가 별로 없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근데 뭐든 다 어울린다는 게 함정 일단 미모와 포스로 올킬.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체로 장미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인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은 건 물론이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배우를 배려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장미희 험담을 한 게 신성일인데,[22] 이 배우의 인간 됨됨이나 주위평을 생각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프로정신이 대단해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23]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고 한다. 장미희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정윤희가 외모로는 압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질 정도였다고. (정윤희와 장미희는 '청실홍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라이벌 관계로 출연한 적도 있다.)
파일:1471507637441.jpg
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또 잘 입는 걸로 유명하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협찬 러브콜을 받는다고 하며, 최고의 명품 패션 하우스중 하나인 에르메스 마니아라고 하는데, 지금도 협찬받기 가장 어려운 에르메스에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협찬한 첫 배우이다.
한창 남북화해 분위기가 있었던 1990년 즈음, 남북 간 연예인들끼리 만나던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북한의 유명 여배우 오미란과 만났다.
1992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남긴 "아름다운 밤이에요" 라는 수상 소감이 지금까지도 유명하다[24].
2011년에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였을 때, 조문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체로 장미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인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은 건 물론이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배우를 배려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장미희 험담을 한 게 신성일인데,[22] 이 배우의 인간 됨됨이나 주위평을 생각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프로정신이 대단해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23]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고 한다. 장미희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정윤희가 외모로는 압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질 정도였다고. (정윤희와 장미희는 '청실홍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라이벌 관계로 출연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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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또 잘 입는 걸로 유명하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협찬 러브콜을 받는다고 하며, 최고의 명품 패션 하우스중 하나인 에르메스 마니아라고 하는데, 지금도 협찬받기 가장 어려운 에르메스에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협찬한 첫 배우이다.
한창 남북화해 분위기가 있었던 1990년 즈음, 남북 간 연예인들끼리 만나던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북한의 유명 여배우 오미란과 만났다.
1992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남긴 "아름다운 밤이에요" 라는 수상 소감이 지금까지도 유명하다[24].
2011년에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였을 때, 조문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5. 출연작 [편집]
5.1. 드라마 [편집]
방영 연도 | 방송사 | 분류 | 제목 | 배역 |
TBC | 금요무대 | 당실 | ||
주말연속극 | - | |||
금요드라마 | - | |||
일일연속극 | 비바람 찬이슬 | - | ||
주말연속극 | 청실홍실 | 지선 | ||
시집갈때까지는 | - | |||
일일드라마 | 언약 | - | ||
납량특집드라마 | 천년호 | 천년묵은 여우 | ||
주간단막극 | 부부 | 갈매 | ||
개국14주년특집극 | 어머니의 강 | - | ||
주말연속극 | 사랑도 미움도 | - | ||
매일연속극 | 이조여인 오백년사 - 원앙별곡 | - | ||
개국15주년특집극 | 대춘향전 | 성춘향 | ||
목금연속극 | 욕망 | 정은 | ||
필녀 | 필녀 | |||
납량특집드라마 | 형사 〈얼굴없는 미녀〉 | |||
일일연속극 | 달동네 | 양순 | ||
KBS | 단막극 | TV 문학관 - 을화 | 을화 | |
TV 문학관 - 배따라기 | - | |||
주간연속극 | 길 | - | ||
단막극 | TV 문학관 - 안개꽃 | - | ||
주말연속극 | 타인 | 오영주 | ||
대하드라마 | 역사는 흐른다 | 쌍순이 | ||
MBC | 미니시리즈 | 육남매 엄마 최용순 | ||
주말연속극 | 한영숙 | |||
SBS | 일일연속극 | 흥부네 박터졌네 | 연지 | |
MBC | 미니시리즈 | 차미희 | ||
SBS | 주말극장 | 정미령 | ||
KBS 2TV | 주말연속극 | 고은아 | ||
SBS | 주말특별기획 | 조아라 | ||
미니시리즈 | 조 마담 | |||
MBC | 일일연속극 | 장백로 | ||
JTBC | 주말연속극 | 윤이실 | ||
일일연속극 | 홍선주 | |||
MBC | 주말연속극 | |||
KBS 2TV | 수목드라마 | 장모란 | ||
JTBC | 금토드라마 | 배미란 | ||
KBS 2TV | 수목드라마 | 장백희 | ||
주말연속극 | 이미연 | |||
SBS | 수목드라마 | 김여옥 |
5.2. 영화 [편집]
연도 | 제목 | 배역 | 관객 수 |
1976 | 성춘향전 | 성춘향 역 | 17,281명 |
1977 | 겨울여자 | 이화 역 | 585,775명 |
1978 | 갯마을 | 해순 역 | 138,856명 |
수경 역 | 327,736명 | ||
1979 | 순악질 여사 | 민공희 역 | 68,925명 |
나팔수 | 해수 역 | 33,997명 | |
느미 | 느미 역 | 46,782명 | |
야시 | 해수 역 | 101,083명 | |
1980 | 색깔있는 여자 | 윤시내 역 | 90,388명 |
겨울 사랑 | 다혜 역 | 44,792명 | |
겨울에 내리는 봄비 | 11,535명 | ||
그 여자 사람잡네 | 70,113명 | ||
내가 버린 여자 2 | 윤정 역 | 36,713명 | |
바다로 간 여자 | |||
불새 | 현주 역 | 87,209명 | |
1981 |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 33,537명 | |
취팔권 광팔권 | 28,072명 | ||
슬픈 계절에 만나요[25] | 민설희 역 | 23,405명 | |
창녀 역 | 60,972명 | ||
1982 | 영심 역 | 73,279명 | |
꽃분 역 | 23,332명 | ||
1983 | 선영 역 | 155,042명 | |
사랑 그리고 이별 | 윤희 역 | ||
1985 | 제인 역 | 495,697명[26] | |
1986 | 황진이 | 황진이 역 | 89,193명 |
1988 | 성야 | 세원 역 | 18,872명 |
1989 | 불의 나라 | 정은하 역 | 117,789명 |
1991 | 윤심덕 역 | 183,760명 | |
1995 | 국희 역 | ||
1997 | 영신 역 | ||
1998 | 시상식 장면 역 | ||
2003 | 원장 수녀 역 | ||
2008 | 의사 역 | ||
2016 | 남양혜 역 |
동시대 여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 흥행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2세대 트로이카는 물론이고, 80년대 트로이카들보다도 흥행력이 뛰어나다. 장미희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후반부터인데, 70년대 전반까지 소급해도 그녀보다 흥행력이 좋은 여배우는 없다. 이런 점을 넘어 장미희 이전 배우도, 이후 배우도 가지지 않은 장미희만의 유일한 기록이 있는데, 그건 역대 국산 최고 영화 흥행 기록을 2차례나 갱신한 유일한 배우라는 점이다.[27] 남자 배우도 이런 기록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장미희의 영화 흥행 실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 예.[28]
5.3. 광고 [편집]
5.4. 방송 [편집]
- 1981년 4월 27일 ~ 9월 19일 9시에 만납시다 : MC 출연
6. 수상 내역 [편집]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1976년 | TBC 연기대상 | 신인상 | 해녀 당실이 |
제11회 핑크리본상 | 신인상 | ||
1977년 | 은곰상 | 여우주연상 | 겨울 여자 |
TBC 연기대상 | 인기상 | 찔레꽃, 비바람 찬이슬, 청실홍실 | |
1978년 | TBC 연기대상 | 최우수 여자연기상 | 어머니의 강 |
1980년 | 제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느미 |
1981년 | 제17회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29] |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30] | TV 문학관 - 을화 |
1983년 | 제22회 대종상 | 여우주연상 | 적도의 꽃 |
1990년 | 제26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불의 나라 |
1991년 | 제12회 청룡영화상 | 여우주연상 | |
제2회 춘사대상영화제 | |||
1992년 | 제30회 대종상 | ||
제37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 |||
제16회 황금촬영상 | 인기여우상 | ||
2008년 | 제1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 대상 | |
제25회 코리아스완베스트드레서 탤런트부문 | 백조상 | ||
여자 인기상 | |||
베스트커플상(with 김용건) | |||
2012년 | 제49회 저축의 날 | 금융위원장 표창 | |
2017년 | 제37회 황금촬영상 | 공로상 | |
2018년 | KBS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연기상 | |
베스트커플상(with 유동근) |
[1] 배우 최불암의 부인 되신다.[2] 당시에는 대상이 따로 없었고, 최우수 남자·여자연기상이 최고의 상이었다.[3] 다만 이 해에는 최고의 상으로 대상이 부활하여 강부자가 대상을 수상했다.[4]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이보희 문서 참고.[5]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1957년 12월 8일로 나오는데 이는 음력 생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58년 1월 27일이 맞는다.[6] 학력위조 사건 관련 기사에서 인터뷰할 때 본인이 "언론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다"면서 그 예로 혈액형을 들었다. 처음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혈액형은 AB형.[7] 동시대에 배우 이영옥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세 여배우들에 비하자면 후세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트로이카에 포함되지는 않는 듯하다. 사실 이영옥의 히트작 중에는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유명작품 하나 빼고는 후세까지 인지도가 남은 게 잘 없기도 하다. 그에 비해 장미희를 포함한 3명은 아직도 인지도 있는 70년대~80년대 히트작이 많았다.[8] 부산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9] 가족관계에 하나 설이 있다. 장미희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었다는 것.[10] 당시 남자주인공은 진짜진짜 시리즈로 유명세를 탄 이덕화였다.[11] 당시에는 유신정권 치하에 놓여 있어서 문화예술적인 제약이 심했는 데다가, TV드라마의 유행으로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침체 상태에 있었다.[12] 정윤희와 라이벌 관계로 출연했다. 시청률은 70% 정도였다고.[13] 3위는 또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14] 수입이 높다고 해서 꼭 인기가 많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윤희의 영화 전성기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그 이전부터 인기를 끈 장미희보다 수입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후로는 정윤희가 수입에서 장미희를 능가한다.[15]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데다가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다고.[16] 1위가 유지인으로 1억 3,440만 원, 2위가 정윤희로 9,600만 원, 3위가 장미희로 7,200만 원이었다. 80년대 트로이카인 이미숙, 원미경은 각각 5위와 8위로, 각각 5,800만 원과 5,000만 원을 벌었다. 또 다른 80년대 트로이카인 정애리는 3,200만 원을 벌었고, 이보희는 당시 무명이었다.[17]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내시와 동시상영하였다. 결과는 152,558명의 관객을 모은 내시의 대승.[18] 사실 유지인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중견급 이상의 여배우들이 이 루트를 타고 있다.[19]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질구봉합수술(즉 여성할례)을 했다고 한다.[20] 딱 봐도 귀부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 음색, 어조다.[21] 이때 장미희는 떡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홀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장미희 특유의 억양의 '똑(떡) 사세요~! 똑(떡)이요~!' 대사는 당시에 성대모사의 소재로 유행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톤으로,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귀하게 자란 마나님이 시장통에서 떡 장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감안해 일부러 저렇게 연기를 했다고.[22] 포동포동한 얼굴의 앳된 장미희가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는지 볼 때마다 ‘너 같은 아이가 어떻게 배우가 되었냐. 얼굴이 꼭 빈대떡 같다’ 라고 대놓고 말했다.[23] 19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보여줬다.[24] 그리고 이 성대모사를 이경실이 자주 구사했었다.[25] 1980년대에 활동한 가수 백영규의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 제목을 따왔고, 백영규가 주인공(남)으로 출연하였다.[26] 당해 최고 관객 수 기록이다.[27]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관객을 동원해서 1974년 46만 관객을 동원했던 별들의 고향 기록을 뛰어넘었고, 이 기록을 1985년 또 다시 본인이 주연으로 등장한 깊고 푸른 밤의 60만 관객 기록으로 갱신했다. 자기가 갱신한 기록을 스스로 깼다[28] 굳이 남자 배우 중에서 언급하자면 신성일이 1974년의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여자에 동시 출연했고, 이 두 영화가 최고 기록을 갱신한 영화이긴 하지만 두 영화에서 신성일이 핵심 남자 주인공이라 보기는 곤란한지라 사실상 장미희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29] 現 백상예술대상[30] 김영란과 공동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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