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분류
이외수 李外秀 | ||
출생 | ||
신체 | ||
국적 | ||
거주지 | ||
본관 | ||
학력 | 춘천교육대학교 (중퇴) | |
직업 | ||
데뷔 | ||
가족 | 배우자 | 전영자 (1976년 11월 29일 ~ 2019년 4월 22일, 2020년 3월 22일~)[5] |
자녀 | 장남 이한얼, 차남 이진얼 | |
링크 | ||
1. 개요 [편집]
"제가 생각하는 기인의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글이나 그림, 음악을 한다고 하면 다 말립니다. 춥고 배고프다 이거지요. 저는 30년 동안 글을 쓰면서 제 마누라와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건 기인 중에 기인이지요."
2. 상세 [편집]
1946년 9월 10일(음력 8월 15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에서 출생했다.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바깥 외(外)자와 항렬자인 빼어날 수(秀)를 합해서 이름이 이외수가 되었다.[8]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가 3살 때 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분이었다.[9]
아버지는 여러 곳에서 군복무를 하였고 이외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학교를 전학다녔는데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상내백초등학교, 대구삼덕초등학교, 강원도 화천군 신풍초등학교, 강원도 양구군 양구초등학교,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 등을 거쳤다. 6학년 때는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이외수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와 인제중학교를 거쳐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했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한 뒤 1971년 제대하고 1972년 춘천교육대학교를 중퇴했다.
어릴 적 꿈은 화가로 춘천교대 시절 미전에 입상한 경력도 있었지만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절망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해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었으며 1973년엔 인제남초등학교 곗골(인제읍 남북리 일대)분교 소사로 잠시 근무하였다.[10]
그에게 있어서 1970년대는 가난으로 찌든 절망의 세월이었다. 춘천에 살면서 구걸한 경험도 있고 하숙집 방세가 밀려서 쫓겨난 적도 있으며 크림빵으로 하루를 때운다거나 생라면 한 봉지로 며칠을 때운 경험도 있다. 심지어는 빈 쓰레기통이나 개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새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것에 본인도 한이 서리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가끔씩 들어오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라는 질문에 "내가 미쳤냐?"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교육대학교 재학시절에서는 당시 학장이 이외수의 생활사정을 참작해서 조금이나마 이외수의 생활을 도와줄 정도이기도 하였다.[11]
1975년 <세대>지에 중편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정식 등단해서 생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였고 강원일보에 기자직으로서 잠시 근무하였다. 1976년 11월 전영자와 결혼하고 춘천 세종학원과 원주 원일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장편 <꿈꾸는 식물>을 발표. 몇편의 단편을 발표하고 창작에만 전념키 위해 79년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이후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창작 활동에서는 가난한 시절 가끔씩 사창가에 빌붙기도 하였는데[12] 이때의 경험이 <꿈꾸는 식물>을 집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창작집 <겨울나기>, 장편 <들개>, <칼>, <산목>, <벽오금학도> 등을 비롯해 에세이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꿈꾸는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은 섬세한 감수성과 환상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미주의적 소설로 신비체험과 초현실세계를 즐겨 다루는 이후의 작품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작가는 90년 나우 갤러리에서 '4인의 에로틱 아트전' 과 94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선화(仙畵)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10월, 위출혈로 인해 진단을 받았더니 위암 2기 판정을 받아 일시적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1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였다. ## 위 절제 수술까지 수반해야 할 정도의 병세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서 고비는 넘겼지만 항암치료는 지속적으로 받았고, 2015년 6월에 항암치료를 마쳤다.[13]
2018년 7월 뜬금없이 음악 단과대학인 남예종(남서울예술종합학교) 학장으로 취임했다.
2020년 3월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입원 치료받고 있다고 한다. 2020년 9월 이외수의 아들이 이외수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고 기사가 나왔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가 3살 때 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분이었다.[9]
아버지는 여러 곳에서 군복무를 하였고 이외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학교를 전학다녔는데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상내백초등학교, 대구삼덕초등학교, 강원도 화천군 신풍초등학교, 강원도 양구군 양구초등학교,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 등을 거쳤다. 6학년 때는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이외수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와 인제중학교를 거쳐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했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한 뒤 1971년 제대하고 1972년 춘천교육대학교를 중퇴했다.
어릴 적 꿈은 화가로 춘천교대 시절 미전에 입상한 경력도 있었지만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절망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해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었으며 1973년엔 인제남초등학교 곗골(인제읍 남북리 일대)분교 소사로 잠시 근무하였다.[10]
그에게 있어서 1970년대는 가난으로 찌든 절망의 세월이었다. 춘천에 살면서 구걸한 경험도 있고 하숙집 방세가 밀려서 쫓겨난 적도 있으며 크림빵으로 하루를 때운다거나 생라면 한 봉지로 며칠을 때운 경험도 있다. 심지어는 빈 쓰레기통이나 개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새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것에 본인도 한이 서리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가끔씩 들어오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라는 질문에 "내가 미쳤냐?"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교육대학교 재학시절에서는 당시 학장이 이외수의 생활사정을 참작해서 조금이나마 이외수의 생활을 도와줄 정도이기도 하였다.[11]
1975년 <세대>지에 중편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정식 등단해서 생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였고 강원일보에 기자직으로서 잠시 근무하였다. 1976년 11월 전영자와 결혼하고 춘천 세종학원과 원주 원일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장편 <꿈꾸는 식물>을 발표. 몇편의 단편을 발표하고 창작에만 전념키 위해 79년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이후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창작 활동에서는 가난한 시절 가끔씩 사창가에 빌붙기도 하였는데[12] 이때의 경험이 <꿈꾸는 식물>을 집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창작집 <겨울나기>, 장편 <들개>, <칼>, <산목>, <벽오금학도> 등을 비롯해 에세이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꿈꾸는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은 섬세한 감수성과 환상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미주의적 소설로 신비체험과 초현실세계를 즐겨 다루는 이후의 작품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작가는 90년 나우 갤러리에서 '4인의 에로틱 아트전' 과 94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선화(仙畵)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10월, 위출혈로 인해 진단을 받았더니 위암 2기 판정을 받아 일시적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1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였다. ## 위 절제 수술까지 수반해야 할 정도의 병세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서 고비는 넘겼지만 항암치료는 지속적으로 받았고, 2015년 6월에 항암치료를 마쳤다.[13]
2018년 7월 뜬금없이 음악 단과대학인 남예종(남서울예술종합학교) 학장으로 취임했다.
2020년 3월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입원 치료받고 있다고 한다. 2020년 9월 이외수의 아들이 이외수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고 기사가 나왔다.
3. 작품과 평가 [편집]
김동리, 백낙청[14]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공모전에서 입상했고 김현[15]에게서는 '이외수는 김승옥, 이청준, 조세희, 윤흥길, 황석영[16] 같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언어를 통해 세상과 투쟁하려고 하는 치열한 감수성의 흔적이 보인다' 는 평을 얻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에도 여러 차례 올라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의 과도한 고평가는 기성문인뿐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폭넓은 독서를 하지 않고 작가의 트위터나 작품만을 접하고는 마치 그것만이 통념, 상식인 것처럼 인용하거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이문열 등의 유명 문인과 비교하는 것이 그 예이다.
작가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행보를 하면서 이에 대한 호불호도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평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 상태. 다만 부족한 필력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장외인간을 펴낸 이후로 6년간 에세이나 아포리즘집만 펴내다가 2011년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방송을 통해 신작을 집필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써낼 5권의 장편소설 역시 기획중이라고 시사했다.
덧붙이자면 일종의 문학만능주의적 사상을 가진 듯하다. 이외수의 소설을 보면 항상 현대의 삭막함을 비판할 때 문학을 치유책으로 내세우며 주인공이나 주요 조연들 중 긍정적인 위치에 있는 캐릭터들은 항상 명문대 문학과를 가는 것으로 나온다. 근작인 완전변태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대지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의 과도한 고평가는 기성문인뿐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폭넓은 독서를 하지 않고 작가의 트위터나 작품만을 접하고는 마치 그것만이 통념, 상식인 것처럼 인용하거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이문열 등의 유명 문인과 비교하는 것이 그 예이다.
작가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행보를 하면서 이에 대한 호불호도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평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 상태. 다만 부족한 필력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장외인간을 펴낸 이후로 6년간 에세이나 아포리즘집만 펴내다가 2011년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방송을 통해 신작을 집필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써낼 5권의 장편소설 역시 기획중이라고 시사했다.
덧붙이자면 일종의 문학만능주의적 사상을 가진 듯하다. 이외수의 소설을 보면 항상 현대의 삭막함을 비판할 때 문학을 치유책으로 내세우며 주인공이나 주요 조연들 중 긍정적인 위치에 있는 캐릭터들은 항상 명문대 문학과를 가는 것으로 나온다. 근작인 완전변태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대지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
3.1. 소설 [편집]
3.2. 시집 [편집]
- 풀꽃 술잔 나비 - 1987년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2000년
-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 때까지 - 2006년
3.3. 에세이 [편집]
3.4. 기타 [편집]
- 감성사전 - 1994년
- 흐린세상 건너기 - 2002년
- 외뿔 - 2001년
-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 2003년
- 뼈 - 2003년
- 글쓰기의 공중부양 - 2006년
-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 2007년
- 마음에서 마음으로 - 2013년[23]
4. 활동 [편집]
인터넷 서브컬처에서 이외수가 가지는 입지와 위상에 대한 부분을 설명한다.
4.1. 방송가 [편집]
4.2. 인터넷 [편집]
이외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컴퓨터로 작품을 써왔는데 독수리 타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원래 바닥에 엎드린 채 베개 하나 껴안고서 펜으로 글을 쓰다가 보니까 자세가 허리에 안 좋아서 대안으로 컴퓨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타자에 적응하지 못해서 작품이 뜻대로 써지지를 않으니까 굉장히 우울했다고. 이 때문에 타자에 적응하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채팅.
이외수가 컴퓨터를 시작한 건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인 90년대 초였기 때문에 PC통신 하이텔의 대화방 등을 통해 채팅을 했었다. PC통신은 고사하고 PC조차도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았던 당시 기성 작가가 이러한 첨단 매체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마이컴과 같은 PC 전문 잡지에서 이외수를 인터뷰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여기서 이외수는 자기가 직접 창안한 각종 이모티콘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날 그가 문단 소설가 중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외수는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갓 보급되는 여명기부터 개인 홈페이지 OISOO를 개설하고 방문객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싸이월드가 뜨니까 미니홈피 또한 개설했으며 트위터가 뜨니까 과연 트위터 역시도 재깍 만들어서 단박에 수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인기 트위터리언이 되었다.[25]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인터넷의 각종 변화와 새로이 보급되는 문물에 대한 적응이 대단히 빠르다.[26]
디시인사이드와는 이래저래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행보나 이미지가 아햏햏과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은데 아햏햏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부족했는지 해당 문화적 코드와 엮여서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양자 사이의 최초의 본격적인 접촉은 아마도 과거 디씨를 주름잡던 초특급 악플러인 런던귀공자가 이외수에게 악플을 달기 시작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런던귀공자의 악플에 시달리던 이외수는 그를 고소하고 실제로 재판소까지 갔다. 훗날 이외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재판에서 검사에게 처벌이 아니라 치료가 됐으면 좋겠으며 이 일로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외수와 디씨의 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바로 2007년 7월 디씨뉴스와의 인터뷰. 바로 위에서 밝힌 런던귀공자와의 일화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거의 모든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를 눈팅한다고 밝히는 등 디씨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보이면서 폐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
양자의 훈훈한 관계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이외수 갤러리를 개설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재조명된 대표적인 서브컬처 코드로 어둠에다크에서 죽음의데스를 느끼며, 유리코 오메가 등이 있다.
한편으로 2008년작 에세이인 하악하악 역시도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영감의 산물.
여담이지만 이외수는 애플의 맥을 쓴다. 블루스크린 때문에 쓰던 글이 날아가는 끔찍한 경험을 몇 번 한 뒤로 맥으로 갈아탔다고.땡스 빌~ 그런데 커널 패닉은 어쩌려고?
2015년 이후로는 트위터보다는 페이스북 위주로 SNS 활동을 하는 듯하다.
영세커뮤니티 엠봉유저로 알려져있다. 최근 몇 년 새 트위터에 간간이 엠봉 링크를 올려 엠봉 유저들 사이에서만 꽤 알려진 사실. 2016년 새해에 첫 인증글을 게시했다.
이외수가 컴퓨터를 시작한 건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인 90년대 초였기 때문에 PC통신 하이텔의 대화방 등을 통해 채팅을 했었다. PC통신은 고사하고 PC조차도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았던 당시 기성 작가가 이러한 첨단 매체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마이컴과 같은 PC 전문 잡지에서 이외수를 인터뷰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여기서 이외수는 자기가 직접 창안한 각종 이모티콘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날 그가 문단 소설가 중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외수는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갓 보급되는 여명기부터 개인 홈페이지 OISOO를 개설하고 방문객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싸이월드가 뜨니까 미니홈피 또한 개설했으며 트위터가 뜨니까 과연 트위터 역시도 재깍 만들어서 단박에 수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인기 트위터리언이 되었다.[25]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인터넷의 각종 변화와 새로이 보급되는 문물에 대한 적응이 대단히 빠르다.[26]
디시인사이드와는 이래저래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행보나 이미지가 아햏햏과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은데 아햏햏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부족했는지 해당 문화적 코드와 엮여서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양자 사이의 최초의 본격적인 접촉은 아마도 과거 디씨를 주름잡던 초특급 악플러인 런던귀공자가 이외수에게 악플을 달기 시작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런던귀공자의 악플에 시달리던 이외수는 그를 고소하고 실제로 재판소까지 갔다. 훗날 이외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재판에서 검사에게 처벌이 아니라 치료가 됐으면 좋겠으며 이 일로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외수와 디씨의 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바로 2007년 7월 디씨뉴스와의 인터뷰. 바로 위에서 밝힌 런던귀공자와의 일화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거의 모든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를 눈팅한다고 밝히는 등 디씨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보이면서 폐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
양자의 훈훈한 관계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이외수 갤러리를 개설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재조명된 대표적인 서브컬처 코드로 어둠에다크에서 죽음의데스를 느끼며, 유리코 오메가 등이 있다.
한편으로 2008년작 에세이인 하악하악 역시도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영감의 산물.
여담이지만 이외수는 애플의 맥을 쓴다. 블루스크린 때문에 쓰던 글이 날아가는 끔찍한 경험을 몇 번 한 뒤로 맥으로 갈아탔다고.
2015년 이후로는 트위터보다는 페이스북 위주로 SNS 활동을 하는 듯하다.
영세커뮤니티 엠봉유저로 알려져있다. 최근 몇 년 새 트위터에 간간이 엠봉 링크를 올려 엠봉 유저들 사이에서만 꽤 알려진 사실. 2016년 새해에 첫 인증글을 게시했다.
4.3. 이외수의 비판 [편집]
4.3.1. 뉴라이트 교과서 비판 [편집]
2008년 12월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올린 수정된 교과서-애국애족 대신 매국매족을?이라는 글에서 뉴라이트의 수정된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올리며 "김구 선생을 테러분자라고 가르치는 세상이 왔으니 머지않아 이순신 장군을 살인마라고 가르치는 세상도 오겠네" 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로 김구=테러리스트 논란은 물론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 여부를 놓고 네티즌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후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해명을 올렸다.
4.3.2. 구로다 가쓰히로의 발언 비판 [편집]
4.3.3. 셧다운 제도 비난 [편집]
4.3.4. 이명박 정부에 대한 독설 [편집]
최시중 등 이명박 정부의 실세들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자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이라며 자화자찬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비꼬아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임을 증명하시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라며 이명박 정부에 독설을 날렸다.
4.3.5. 김진태의 촛불 발언 비판 [편집]
4.4. 사건사고/논란 [편집]
5. 기타 [편집]
- 인사동에 있는 카페인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해 자연스럽게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으며 특히 중광 스님, 천상병, 이외수는 이곳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 과거에 담배를 하루에 8갑(...)씩 피웠다고 한다. 지금은 금연한다고 한다. 썰에 의하면, 금연 클리닉에 가서 "8갑쯤 피운다"고 했더니 의사가 "끊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좀 줄이거나 단단히 각오를 하셔야 한다. 아니면 그냥 피우시라"고 했다고(...). 8갑이면 160개피이고, 하나 피우는데 5분만 잡아도 하루 13시간을 담배만 물고 있어야 된다(...).
- 무릎팍도사 출연 당시에 의하면 '죽는 데 별로 미련은 없는데 대표작 1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서 4갑 피던 것을 하루 아침에 단방에 금연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당연히 병원에 입원. 그외 가난했던 시절에는 거의 알코올 의존증자 수준으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한적한 두메산골 분교의 객원교사로 있으면서 손발이 오그라들 수준의 금단증세와 유명해지기 전까지 따라다녔던 곤궁함을 겪으면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을 자신의 수필 등으로 피력한 바가 있다.
요새는 스트레스를 술 대신에 노래로 푼다고 한다. 저택에 아예 노래방 기계를 사다 놓고 하루에 두 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실제로 1박 2일 촬영 당시 아침에 멤버들이 찾아갔는데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절대 설정 아니라는 자막은 덤.
- 한때는 소설 집필을 위해 요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완전변태에 수록된 <파로호> 집필 활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소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호수 위에서 써야 소설이 술술 써질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요트를 하나 장만한 거라고.
- 언젠가부터 DAW를 사용해서 자작곡 인스트루멘탈도 하는 듯하다. 단 작곡 같은 경우는 취미 삼아서 하는 듯. 주로 쓰는 DAW 프로그램은 Reason이라고 한다. 그가 작곡한 음원은 이외수 문학관 내의 BGM으로 나온다.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 출연하여 밝히기도 했다.[30]
-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 갑자기 2020년 3월 22일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치료중이라고 한다.[31] 아들인 이한얼 씨가 이외수의 페이스북에 현재 상태를 올렸는데 고비가 계속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 졸혼관계였던 아내 전영자씨가 졸혼을 종료하고 아내와 자식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다.기사 이후 4월 24일부로 상태가 많이 좋아져 지금은 일반병실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후 재활병원으로 옮겨 재활 치료를 시작했지만, 최근 폐렴에 걸려서 다시 일반병원으로 옮기기도 했으며, 아직 연하장애로 음식물 섭취, 말하기 등이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
10월 1일 아들 이한얼씨가 추석 겸 이외수의 생일을 맞아 아버지의 회복 상황을 전했다. #
6. 같이 보기 [편집]
[1] 음력 1946년 8월 15일[2]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3] #[4] 상세 주소는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감성마을길 157 (지번: 다목리 792)[5] 이외수의 뇌출혈로 졸혼을 종료하고 간호중이라고 한다[6] 유튜브는 사실상 브이로그를 주 콘텐츠로 하고 있다.[7] 그렇게 말했다고는 하지만, 이외수 본인은 지역일간지 기자, 교생 시절, 등단 초창기부터 결혼 초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가난함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힘든 삶을 살았었다.[8]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세손(대수로 변환하면 17대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 아버지 성함은 양녕대군 17세손(대수로 변환하면 16대손) '승(承)' 자 항렬을 넣은 이승윤. 즉 이승만의 조카 뻘이자 이승기의 할아버지 뻘이 된다.[9] 그래서 2007년 타계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10] 그가 담당하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두메산골 아이들로 처음에는 소통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 마을 사람들 전체가 까막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경험은 그가 소설을 쓰는데 큰 영감을 받은 적이 있기도 하다.[11] 산문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의 내용을 기초로 보충함.[12] 너무 굶고 살아서 미녀를 봐도 성욕이 돋궈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13] 아침마당 2015년 10월 12일자 방영분에서 암 투병 경험담을 술회했다. #.[14] 참여문학을 주장하며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거목[15] 순수문학을 주장하며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거목[16] 모두 당대에는 문학사를 이끌던 젊은 작가들이었다.[17] 2월 20일부터 카카오페이지에 선행연재, 5월 30일 종이책 정식발매.[18] 식물과 텔레파시로 소통한다는데, 그게 그저 주변에 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최소한 대한민국 전국의 모든 수목과 소통하고 모든 수목의 실시간 시야는 물론이고 기억까지 염사로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상 나무가 있다면 어디든지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정보력만큼은 능력자 수준이라는 것. 사실 전전작인 괴물에서도 메인 빌런이 세계를 말아먹을 수도 있는 잠재력이 있었지만, 좀더 큰 계획을 세운다면서 비범한 기생 한 명을 볼모로 잡을 궁리만 하다가 지나가던 시골 소년에게 발렸다.[19] 아마도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이름을 합친 듯한 느낌이다.[20] 직접적으로 대통령이(었다)라고 명시한 건 아니지만...[21] 이 책에는 5종의 숫자 이스터에그가 숨겨져있다. 공식적으로 밝힌 일례는 이런 날. #[22] 시기와 표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투병 중에 써낸 책이다.[23] 소설가 하창수와 이외수의 대담집 형식.[24] 당시 양택조와 대결을 했었는데 이외수가 이겼다!![25] 2011년 11월 3일 오후 3시 42분에 트위터 팔로워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외수가 직접 캡쳐한 인증샷.[26] 앞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 이외수는 항상 앞서 나갔다. 국내에 SNS가 별로 흥하지 않던 시절에 플레이톡, 미투데이도 활용하였고 트위터도 지금처럼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SNS가 양분하기 되기 한참 전부터 이용하였다.[27] 아시다시피 이외수의 영문서명은 Lee Oisoo다.[28] 출처는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29] 제27보병사단의 상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 제도가 도입되면서 민간인에게 문제 병사를 상담시키지 않게 되어 중단했다.[30] "그다음에 거기(문학관)에 나오는 배경음악, BGM 그건 제가 미디로 작업해서 만든 곡들입니다"(15'59) [31] 4월 2일 기사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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