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공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위(衛)나라 19대 국군 의공 懿公 | |||
희(姬) | |||
위(衛) | |||
적(赤) | |||
아버지 | 위혜공(衛惠公) 희삭(姬朔)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60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
1. 소개 [편집]
2. 생애 [편집]
수도 조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제 환공의 원조로 초구로 수도를 옮겨 재건했다.
위 의공 9년(기원전 660년), 위 의공이 적족에게 살해당했다. 그 까닭은 아래 항목의 일화에서 보면 학덕후 질에 위 혜공의 악행과 백성과 대신들이 모두 복종하지 않은 탓이다. 이유야 어쨌든 위나라 사람들은 위 혜공의 자손들을 멸족시켜 위나라와 위 혜공의 일족은 망해버리고 말았다.[2] 사람들은 급자의 후손과 공자 수의 자손을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없었다. 위후검모를 되세우고 싶어도 그마저 죽은 뒤였다. 그나마도 위후 검모는 후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급자와 위후검모의 친동생이자 소백과 선강의 아들 공손 신(申)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 대공이다.
위 의공 9년(기원전 660년), 위 의공이 적족에게 살해당했다. 그 까닭은 아래 항목의 일화에서 보면 학덕후 질에 위 혜공의 악행과 백성과 대신들이 모두 복종하지 않은 탓이다. 이유야 어쨌든 위나라 사람들은 위 혜공의 자손들을 멸족시켜 위나라와 위 혜공의 일족은 망해버리고 말았다.[2] 사람들은 급자의 후손과 공자 수의 자손을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없었다. 위후검모를 되세우고 싶어도 그마저 죽은 뒤였다. 그나마도 위후 검모는 후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급자와 위후검모의 친동생이자 소백과 선강의 아들 공손 신(申)을 세우니 그가 바로 위 대공이다.
3. 일화 [편집]
위 의공은 궁궐에 거대한 새장을 짓고 수집한 학을 거기 모아서 길렀으며 그 학들에게 벼슬[3]을 내리고 국고를 기울여 수입 곡물을 사먹이는 희대의 뻘짓을 했다. 역시 뻘짓도 대륙의 기상 오오 사실 곡물만 먹이는 것도 육식성에 가까운 학의 건강상 좋지 않다는 것도 아이러니.
이 때문에 나라 안팎의 불만을 산 나머지 적인(狄人)[4]이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나라 안팎의 불만을 산 나머지 적인(狄人)[4]이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
라고 하며 조롱할 정도였다.
이에 학들을 풀어주고 몸소 방어전을 지휘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박살나고 본인도 피떡이 되도록 칼로 난도질되어 끔살당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였는데 타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던[5] 대부 굉연(宏演)이 나중에 전쟁터에서 주군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은 간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 멸망 직전의 위기라 장사를 지낼 사람과 도구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굉연은 스스로 할복하고 자신의 몸을 관 삼아 그 간을 담고는 순절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부복납간(剖腹納肝)이다.
4. 기타 [편집]
이후의 위나라의 임금 자리는 문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했는데, 나중에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압박으로 희성(姬姓) 위씨(衛氏) 군주가 퇴출되고 신하였던 희성(姬姓) 자남씨(子南氏) 군주가 들어선다. 그리고 자남씨는 문공의 7세손이며 위 영공의 아들인 공자 영에게서 갈려나온 집안으로 여전히 문공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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