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훈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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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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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2016년 5월 10일 (95세) | |||||||||||||||||||||||||||
본관 | ||||||||||||||||||||||||||||
호 | 청농(靑農) | |||||||||||||||||||||||||||
재임기간 | 제21대 국무총리[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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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동(현 동창군 청룡리)에서 아버지 강병헌(姜炳憲)과 어머니 이병희(李炳姬)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변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유학을 선택,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인해 1944년 1월 20일부로 봉천의 보병학교에 입교, 1945년 초 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입교, 수료한 후 그해 7월 견습 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 직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귀국을 기다렸고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졸업했다.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
196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내려졌으나 강 전 총리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은 졸업생 자격으로 육사에 들어와서 생도들을 자기 임의대로 끌고 나와서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시키려고 했던 전두환 대위를 저지했는데 이에 전두환 대위는 이걸 박정희 소장에게 고자질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소장은 강영훈 중장을 전술한 바와 같이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해버렸다.
이후 군정 치하에서 반혁명죄로 숙청된 이한림, 장도영, 김웅수 등과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을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도 계속 밝혔듯이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학교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외교안보연구원장(현 국립외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부터 주 영국 대사 및 주 아일랜드 대사, 주 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첫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국무총리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2016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8.15 광복 직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귀국을 기다렸고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졸업했다.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육군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
196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내려졌으나 강 전 총리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은 졸업생 자격으로 육사에 들어와서 생도들을 자기 임의대로 끌고 나와서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시키려고 했던 전두환 대위를 저지했는데 이에 전두환 대위는 이걸 박정희 소장에게 고자질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소장은 강영훈 중장을 전술한 바와 같이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해버렸다.
이후 군정 치하에서 반혁명죄로 숙청된 이한림, 장도영, 김웅수 등과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을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도 계속 밝혔듯이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학교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외교안보연구원장(현 국립외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부터 주 영국 대사 및 주 아일랜드 대사, 주 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첫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국무총리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았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이야기』,『소련견제이론』,『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2016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3. 총리 시절 [편집]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일본의 쇼와 덴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1:34:53)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512_326_11.jpg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파일:/image/001/2016/05/10/PYH2016051010610001300_P2_99_20160510155811.jpg
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
여담으로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모두 고려하여 '주석님'이라는 가벼운 존칭으로 부르려 했으나[4] 김일성이 인사말 도중 강영훈 총리 각하라는 더 높은 존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로 격상시켜 호칭했다고.[5]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 대거 보도되었으나 매스컴을 통해서는 KBS 뉴스 9에서만 보도되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사진으로조차 국내 언론에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TV에 김일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이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으며, 당연히 강영훈 총리가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걸 그대로 내보내는게 어찌보면 시기상조였던 셈. 물론 당시의 KBS가 사실상 정부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이었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정부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정도로 남북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면담 도중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고. 다만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78세로 팔순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정도의 착각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일본의 쇼와 덴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1:34:53)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512_326_11.jpg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파일:/image/001/2016/05/10/PYH2016051010610001300_P2_99_20160510155811.jpg
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
여담으로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모두 고려하여 '주석님'이라는 가벼운 존칭으로 부르려 했으나[4] 김일성이 인사말 도중 강영훈 총리 각하라는 더 높은 존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로 격상시켜 호칭했다고.[5]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 대거 보도되었으나 매스컴을 통해서는 KBS 뉴스 9에서만 보도되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사진으로조차 국내 언론에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TV에 김일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이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으며, 당연히 강영훈 총리가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걸 그대로 내보내는게 어찌보면 시기상조였던 셈. 물론 당시의 KBS가 사실상 정부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이었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정부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정도로 남북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면담 도중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고. 다만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78세로 팔순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정도의 착각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4. 여담 [편집]
- 총리 재임 시절 북한과의 회담에서 북한 측은 강영훈 총리가 자신들에게 의외로 강경하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강영훈 총리는 퇴임 후 인터뷰에서 북한은 정상국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 한 인터뷰에서 인도적인 대북지원은 최대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1] 호적상으로는 1922년생.[2] 인근의 금성동·송학동·용두동에 진주 강씨 집성촌이 있었다.[3] 정식 취임 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1988년 12월 5일 ~ 1988년 12월 15일)[4] 당시에는 언론에서 김일성을 호칭할 때 그냥 이름만 부르는게 일반적이었고, 굳이 직무를 붙인다고 해도 '북한 주석 김일성은' 이런 식으로만 호칭할뿐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았던 것. 그런데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대면하는 이상 직무를 붙여서 호칭하는건 당연지사였고, 여기에 더해 '주석'이라고만 부르기도 뭣하니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서 '님'을 붙이기로 했던 것.[5] 이 때 김일성은 남북 대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심지어는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일부 온건파가 자본주의 도입을 건의하자 일단 들어보자며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 정도로 자신이 공들인 남북 대화 덕분에 대한민국의 2인자나 다름없는 국무총리를 만났으니 각하라는 호칭까지 쓴건 어찌보면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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