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친왕비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홍씨 [편집]
흥친왕비 홍씨 興親王妃 洪氏 | |
작호 | 정경부인(貞敬夫人) → 증(贈) 흥친왕비(興親王妃) |
본관 | |
남편 | |
생부 | 홍병주(洪秉周) |
출생 | |
사망 | |
자녀 | 아들 영선군 이준용, 이문용 딸 2명, 의붓딸 1명 |
2.1. 생애 [편집]
3. 이씨 [편집]
흥친왕비 이씨 興親王妃 李氏 | |
작호 | 군부인(郡夫人) → 흥친왕비(興親王妃) |
본관 | |
남편 | |
생부 | 이인구(李麟九) |
출생 | |
사망 | |
자녀 | |
3.1. 생애 [편집]
1883년(고종 20년)에 참봉을 지냈던 이인구의 딸로 태어났다. 1902년(광무 6년)에 무려 38살 연상인 완흥군 이재면과 혼인했다. 완흥군에게는 재혼이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남편 완흥군이 '이희(李熹)'로 개명하고 '흥친왕(興親王)'으로 책봉받으면서 '흥친왕비(興親王妃)'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2주 뒤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흥친왕이 '이희공(李熹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희공비(李熹公妃)'로 불렸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남편 완흥군이 '이희(李熹)'로 개명하고 '흥친왕(興親王)'으로 책봉받으면서 '흥친왕비(興親王妃)'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2주 뒤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흥친왕이 '이희공(李熹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희공비(李熹公妃)'로 불렸다.
1912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종친들과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1924년 1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훈이등 수보관장을 수여받았고# 1925년 7월에는 전주 이씨 종친 청년회에서 의료구호활동을 할 때 의복 100건을 기부했다.#
6.25 전쟁 초반에는 미처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창덕궁 낙선재를 빠져나와 운현궁으로 피신한 순정효황후[1]에게 자신이 쓰던 방을 내어주었으며 1.4 후퇴 때에는 부산 구포로 같이 피난가기도 했다.#
6.25 전쟁 초반에는 미처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창덕궁 낙선재를 빠져나와 운현궁으로 피신한 순정효황후[1]에게 자신이 쓰던 방을 내어주었으며 1.4 후퇴 때에는 부산 구포로 같이 피난가기도 했다.#
부산 피난 시절 순정효황후(왼쪽)와 흥친왕비(오른쪽) |
3.2.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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