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금만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홍금만은 1879년생이며 경기도 용인군 출신이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음력 7월 19일에 정철화 의병장의 의병부대 30여 명이 그의 마을을 지나가며 “의병은 적당을 제거하고 의거하여 보국안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죽산군·충주군·청주군 등지를 다니며 항일 투쟁을 수행하던 중 충주 방여탄에서 일본 군병과 교전하다가 피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08년 음력 2월 9일 박춘식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에 가담하여 유태수·송금봉 등과 같이 용인 성산리 존위(尊位)와 마가실(麻柯室) 존위 집에서 화승총 값으로 각각 400여 냥을 거두고,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 같은 해 음력 2월 10일에는 박춘식·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강원도 김봉기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용인 성산리 존위와 이가(李哥)의 집에서 군자금 480냥을 거두고, 마가실(麻柯室) 이공록(李公祿)의 집에서도 군자금 450냥을 모금하였으며, 광주 전지리 서낭청(徐郎廳)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된 그는 1908년 6월 17일 경기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홍금만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 후 1908년 음력 2월 9일 박춘식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에 가담하여 유태수·송금봉 등과 같이 용인 성산리 존위(尊位)와 마가실(麻柯室) 존위 집에서 화승총 값으로 각각 400여 냥을 거두고,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 같은 해 음력 2월 10일에는 박춘식·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강원도 김봉기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용인 성산리 존위와 이가(李哥)의 집에서 군자금 480냥을 거두고, 마가실(麻柯室) 이공록(李公祿)의 집에서도 군자금 450냥을 모금하였으며, 광주 전지리 서낭청(徐郎廳)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된 그는 1908년 6월 17일 경기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홍금만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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