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식(1871)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 [편집]
박춘식은 1871년생이며 경기도 용인현 출신이다. 그는 1907년 음력 7월 김봉기(金奉基)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병 2백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광주·양천·지평·가평·춘천·횡성·양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그는 양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이어서 가평에서 백미 150석과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였다.
또 1908년 음력 2월 10일 의병 홍금만·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용인·광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춘식은 의병의 목적을 "일본군과 접전하여 머리를 깎지 않고 개화인을 축출하여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1908년 음력 2월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어 1908년 6월 17일 경성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춘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 1908년 음력 2월 10일 의병 홍금만·유태수·송금봉 등과 함께 용인·광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춘식은 의병의 목적을 "일본군과 접전하여 머리를 깎지 않고 개화인을 축출하여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1908년 음력 2월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어 1908년 6월 17일 경성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춘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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