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연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한문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역대 직책 |
NC 다이노스 No.82 | |
한문연 韓文埏 / Han Mun-Yeon | |
생년월일 | |
신체 | 173cm, 85kg |
출신지 | |
학력 | |
포지션 | |
투타 | |
프로입단 | |
소속팀 | 파일:attachment/lottegiantsoldlogo11.jpg 롯데 자이언츠 (1983~1992) |
지도자 | 파일:lotte_giants_1992_logo.png 파일:lotte_giants_1996_logo.png 롯데 자이언츠 1군 배터리코치 (1993~2001) 파일:SK_Wyverns_logo_1st.png SK 와이번스 1군 배터리코치 (2002) 파일:lotte_giants_2003_logo.png 파일:attachment/lotte_giants.png 롯데 자이언츠 1군 배터리코치 (2003~2010) 파일:SK와이번스 로고.png SK 와이번스 2군 배터리코치 (2011) 파일:SK와이번스 로고.png SK 와이번스 1군 배터리코치 (2011) 파일:NC_Emblem_Home.png NC 다이노스 배터리코치 (2012) 파일:NC_Emblem_Home.png NC 다이노스 2군 수석코치 (2013) 파일:NC_Emblem_Home.png NC 다이노스 2군 감독 (2014) 파일:NC_Emblem_Home.png 고양 다이노스 감독 (2015~2018) 파일:NC_Emblem_Home.png NC 다이노스 잔류군 총괄·배터리코치 (2019) 파일:NC_Emblem_Home.png NC 다이노스 2군 배터리코치 (2020~) |
병역 | |
수상 | 한국시리즈 우승 2회 (1984, 1992) |
1. 개요 [편집]
2. 선수 시절 [편집]
마산상고 출신으로 동아대를 거친 포수다. 아마 시절 포수로서 명성이 높아 동아대학교 4학년이던 1982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발탁되었고, 대한민국이 우승하면서 우승 멤버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3]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같은 해 입단한 최동원과 함께 배터리를 구성하면서 롯데의 주전 포수로 뛰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공을 받아 내었고, 7차전에서는 7회초 추격의 발판이 되는 3루타를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최동원과 함께 마운드에서 환호하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당시 롯데에는 국가대표 출신의 고참 포수 심재원이 버티고 있었지만 최동원이 직접 자신의 전담포수로 지목할 정도로 최동원에게 인정받았다.[4][5]
파일:external/dimg.donga.com/52146097.2.jpg
1986년 6월 5일, 김정행이 당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때 포수로서 그의 공을 받기도했다.
초창기 롯데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뛰던 한문연은 1987년 스프링캠프 도중 어깨에 이상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그 해엔 2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부터는 고참 김용운에 이어 1989년에 입단한 신예 김선일과 마스크를 나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한 1991년에는 당시 프로 3년차의 신인급 선수였던 김선일에게 주전포수 자리를 내주었으며, 1992년에는 플레잉 코치로 뛰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매듭짓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래도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엔트리에 들어 롯데가 차지한 2차례의 우승에 모두 함께 하는 기쁨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같은 해 입단한 최동원과 함께 배터리를 구성하면서 롯데의 주전 포수로 뛰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공을 받아 내었고, 7차전에서는 7회초 추격의 발판이 되는 3루타를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최동원과 함께 마운드에서 환호하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당시 롯데에는 국가대표 출신의 고참 포수 심재원이 버티고 있었지만 최동원이 직접 자신의 전담포수로 지목할 정도로 최동원에게 인정받았다.[4][5]
파일:external/dimg.donga.com/52146097.2.jpg
1986년 6월 5일, 김정행이 당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때 포수로서 그의 공을 받기도했다.
초창기 롯데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뛰던 한문연은 1987년 스프링캠프 도중 어깨에 이상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그 해엔 2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부터는 고참 김용운에 이어 1989년에 입단한 신예 김선일과 마스크를 나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한 1991년에는 당시 프로 3년차의 신인급 선수였던 김선일에게 주전포수 자리를 내주었으며, 1992년에는 플레잉 코치로 뛰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매듭짓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래도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엔트리에 들어 롯데가 차지한 2차례의 우승에 모두 함께 하는 기쁨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3. 지도자 시절 [편집]
4. 기타 [편집]
- 선수 시절 최동원의 전담 포수였기 때문에 함께 숙소방을 썼다. 최동원은 워낙 철두철미한 자기관리로 정평이 나서 다음날 저녁에 경기를 해도 꼭 그전날 밤 9시 전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원칙을 지켰다. 다른 선수들은 술을 마시러 가는 경우도 있고 놀러 나가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숙소에서 잡담도 하고 그러다가 늦게 자기도 했는데 최동원은 절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답답했던 한문연이 8시~9시쯤에 "선배님 내일 저녁 경기인데 TV라도 좀 보다 잡시다~"라고 하소연하면 최동원이 "쓰읍, 마 시끄럽다. 빨리 불 끄라!"라고 했고 후배였던 그는 찍소리도 못하고 불끄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한문연은 이에 대해 회상하며 그때는 답답하기도 하고 잠도 안 오고 했지만 점점 적응이 되어가면서 그렇게 억지로라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다보니 본인도 컨디션이 좋아져서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걸 느꼈고, 자신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 안중열이 부산고 시절에 한문연에게 가서 지도를 받았다.
5. 연도별 성적 [편집]
역대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3 | 57 | 123 | .220 | 27 | 3 | 0 | 1 | 9 | 8 | 1 | 13 | .268 | .292 | |
1984 | 63 | 141 | .291 | 41 | 7 | 0 | 4 | 16 | 14 | 0 | 19 | .426 | .375 | |
1985 | 97 | 270 | .267 | 72 | 12 | 0 | 3 | 29 | 27 | 2 | 25 | .344 | .323 | |
1986 | 86 | 228 | .250 | 57 | 10 | 0 | 2 | 15 | 20 | 0 | 16 | .320 | .297 | |
1987 | 25 | 55 | .200 | 11 | 1 | 2 | 0 | 2 | 3 | 0 | 6 | .291 | .279 | |
1988 | 62 | 119 | .261 | 31 | 8 | 0 | 0 | 20 | 9 | 2 | 12 | .328 | .326 | |
1989 | 78 | 168 | .256 | 43 | 8 | 0 | 0 | 16 | 14 | 1 | 19 | .304 | .328 | |
1990 | 90 | 218 | .252 | 55 | 11 | 0 | 1 | 31 | 16 | 2 | 27 | .317 | .329 | |
1991 | 89 | 146 | .288 | 42 | 8 | 2 | 2 | 24 | 6 | 0 | 16 | .411 | .354 | |
1992 | 31 | 22 | .091 | 2 | 0 | 0 | 1 | 1 | 2 | 0 | 2 | .227 | .167 | |
KBO 통산 (10시즌) | 663 | 1490 | .256 | 381 | 68 | 4 | 14 | 163 | 119 | 8 | 155 | .335 | .323 | |
[1]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2]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3] 동아대 시절 4번 타순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의 강타자였지만, 프로에서는 아마 시절만큼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4] 한문연은 최동원이 선배인 심재원보다 후배인 자신을 좀 더 편하게 생각해서 지목한것 같다며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겸손의 표현에 가깝다. 앞서 설명했듯 한문연은 국가대표에도 선정되는 등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는 포수였다.[5] 아마시절에는 4번 타자를 맡았을 정도로 공격력도 준수했다. 동아대 4번 타자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당시 아저씨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1984년을 정점으로 타격 성적이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딱히 인상적인 공격력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그러나 1984년에는 0.291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심재원보다는 훨씬 더 공격력이 좋은 편이었다.[6] 이순철은 "최동원 선배와 한문연 선배를 상대 배터리로 만나는 날에는 정말 경기장도 가기 싫고 타석에서도 삼진 좀 덜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한문연 선배는 커브가 떨어지는데 볼이라서 (제가) 안 치면, 그 뚝 떨어지는 걸 이렇게 잡아서 신기하게 들어 올려버리니까~ 심판이 그걸 자꾸 스트라이크를 준다니까요. 그럼 또 삼진 먹고. 최동원 선배 공을 치는 거 자체도 어려운데 한문연 선배가 잡는 것까지 그래버리니까~ 너~무 얄밉고 타석에도 너무 가기 싫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주 얄미워 죽는 거죠. 정~말 상대하기 싫은 포수였어요."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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