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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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10년, 한성부 종로(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홍천이며, 호는 금아(琴兒)이다. 부친은 구한말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 서울 종각에서 종로5가 땅까지, 강남에서는 양재동 땅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유명한 부호였다.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서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2]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3]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서울 반포에 있는 집에서 살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선종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4]
말년에 수필 창작 활동이 없었던 것은 이전의 작품들을 뛰어넘는 글을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
장례는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뜻에 맞게 장례미사로 치뤘다. 우연히도 이 장례미사를 행한 5월 29일(양력 기준)은 피천득의 생일이었다. 장지는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이다.
6살 무렵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일본인 대신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천득이 10살이던 1920년에는 모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의 호인 '금아'(琴兒)는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書畵)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호이다.
서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도중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1929년부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호강대학)[2]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1937년 졸업 때까지 국내를 여러 번 오가며 많은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社[3]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가 서울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영문학 연구와 시 창작에 매진하던 중 1945년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1946년 이름이 바뀐 서울대학교에서 1974년까지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약 1년간 영문학 연구를 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시의 성심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에는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 후 서울 반포에 있는 집에서 살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선종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97세까지 장수한 듯하다.[4]
말년에 수필 창작 활동이 없었던 것은 이전의 작품들을 뛰어넘는 글을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
장례는 천주교 신자인 고인의 뜻에 맞게 장례미사로 치뤘다. 우연히도 이 장례미사를 행한 5월 29일(양력 기준)은 피천득의 생일이었다. 장지는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이다.
3. 작품에 대한 평가 [편집]
그의 문학적 시작은 영문학, 시(詩)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교과서에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많이 실린 영향인지, 요즘 세대에게는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 실린 또는 실렸던 그의 수필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사랑하는 생활
- 수필
- 플루트 플레이어
4. 일화와 지인들 [편집]
4.1. 일화 [편집]
인연을 읽어보면 알겠지만[5] 알아주는 딸내미바보이다. 그래서 그가 아들 둘이 더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당사자가 자신을 피천득의 아들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피천득 선생님에게 아들도 있었어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했을 정도다.
딸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했으며,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딸 서영을 두고 당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가 각축전을 벌이자 "수업일수 중 3분의 1을 결석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화여고로 진학시켰다.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무조건 결석. 대신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1:1 가르침을 받았다.
서영은 잦은 결석으로 인해 내신성적은 비교적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에서는 눈에 띄는 두각을 보였다고. 결국 서울대로 진학했으며 지금도 물리학자로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교육 방식이 남달랐던 듯. 딸에게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을 멘토로 삼을 것을 권한 것도 피천득 선생.
딸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했으며,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딸 서영을 두고 당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가 각축전을 벌이자 "수업일수 중 3분의 1을 결석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화여고로 진학시켰다.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무조건 결석. 대신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1:1 가르침을 받았다.
서영은 잦은 결석으로 인해 내신성적은 비교적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에서는 눈에 띄는 두각을 보였다고. 결국 서울대로 진학했으며 지금도 물리학자로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교육 방식이 남달랐던 듯. 딸에게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을 멘토로 삼을 것을 권한 것도 피천득 선생.
4.2. 지인 [편집]
5. 가족 [편집]
그의 수필집을 보면 가족에 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가족들 또한 선친만큼 각자의 영역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다음 항목은 그의 가족 중 유명인사에 대한 것.
[1] 1919년생으로 2011년에 선종했으며, 남편과 아내 모두 각각 97세, 92세로 굉장히 장수했다.[2] 중국 공산화 후 폐교되어 없어졌다. 동문으로 김웅권, 주요섭, 주요한, 현진건(중퇴) 등이 있다.[3] 록펠러 가문의 회사로 유명하다.[4] 체질상 안 맞았다고 한다.[5]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딸 피서영에게 선물로 줄 인형을 사러 여러 백화점을 전전하다가 수필 인연의 소재가 되는 일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6] 1965년 서울대 화학과에 합격(동아일보 1965년 2월 14일 호외 1면 서울대합격자 명단), 1970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서울대 총동창회 인명록)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65년 화학과에 합격하였으나 전과를 통해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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