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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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항일 운동 [편집]
3. 광복 이후 [편집]
북한으로 입국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 부수상(재정상) 등의 요직을 맡았다. 북한 체제 수립 과정에서 최창익은 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곧 계급투쟁이라는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는 연안파의 최고실력자[2] 로서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짰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접촉하기도 했다. 즉, 8월 종파 사건의 최대 배후.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미코얀,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으로 와 김일성에게 그의 복권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는 연안파의 최고실력자[2] 로서 김일성을 실각시키고 본인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려는 계획을 짰고 이 과정에서 중국, 소련과 접촉하기도 했다. 즉, 8월 종파 사건의 최대 배후. 그러나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후 소련의 미코얀,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으로 와 김일성에게 그의 복권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는 1957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4. 평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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