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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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정인국은 1858년생이며 서울 종로구 사직동 출신이다. 그는 1903년 황해도 해주군수로 부임했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노하여 사임한 뒤, 나철,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7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유배를 갔다가 순종 즉위 후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1907년 9월 의병을 일으킨 그는 5개 중대로 편성된 평산의진의 총대장을 맡았다. 실제 의병 투쟁은 중대장 중심으로 운용되었고, 5개 중대가 연합 작전을 전개할 때는 대대장 이진룡이 맡았다.
이후 2년여간 일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인 그는 1910년 5월 7일 80여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황해 평산, 금천군 등지에서 의병 간의 연합을 주선하는 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기밀을 입수한 평산군 온정면 및 금천 헌병분견소 헌병대가 출동했다. 얼마 후 회의를 마치고 참모 이영만, 나이 어린 병사 한 명과 함께 하산하던 그는 온정원 헌병분견소와 금천헌병분견소가 파견한 헌병 2명, 헌병보조원 4명과 마주쳤다.
이때 그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아 적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이영만에게 도망가라고 명령한 후 가지고 있던 비수를 꺼내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순간 일본 헌병이 그를 사로잡기 위해 달려들자,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 일본 헌병에게 비수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이영만은 명령에 따라 도망가던 중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헌병과 보조원들을 보자 발길을 돌렸고, 정인국이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돌멩이를 주워서 정인국과 격투를 벌이던 일본 헌병의 머리와 등을 힘껏 내리쳤다. 이에 일본 헌병보조원이 총격을 가했고, 두 의병장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일제 해주경찰서장은 1910년 5월 8일 내무경무국장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후 2년여간 일본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인 그는 1910년 5월 7일 80여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황해 평산, 금천군 등지에서 의병 간의 연합을 주선하는 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기밀을 입수한 평산군 온정면 및 금천 헌병분견소 헌병대가 출동했다. 얼마 후 회의를 마치고 참모 이영만, 나이 어린 병사 한 명과 함께 하산하던 그는 온정원 헌병분견소와 금천헌병분견소가 파견한 헌병 2명, 헌병보조원 4명과 마주쳤다.
이때 그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아 적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이영만에게 도망가라고 명령한 후 가지고 있던 비수를 꺼내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순간 일본 헌병이 그를 사로잡기 위해 달려들자,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 일본 헌병에게 비수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이영만은 명령에 따라 도망가던 중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헌병과 보조원들을 보자 발길을 돌렸고, 정인국이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돌멩이를 주워서 정인국과 격투를 벌이던 일본 헌병의 머리와 등을 힘껏 내리쳤다. 이에 일본 헌병보조원이 총격을 가했고, 두 의병장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일제 해주경찰서장은 1910년 5월 8일 내무경무국장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 폭도 거괴 전 군수 정인국이 각 수괴를 평산군 용산면의 산중에 모아놓고 회의 중인 것은 온정원분견소에서 수색, 체포에 나서 정인국 외 2명을 발견, 격투가 벌어져 병사 한 명이 중상을 입었으나 마침내 정인국 외 1명을 살육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정인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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