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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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대한민국 제 13·14·16대 국회의원 정대철 鄭大哲 | Jeong Dae Cheol | |
파일:정대철.jpg△ 2020년 모습[5] | |
생년월일 | |
출신지 | |
본관 | 진주 정씨 |
거주지 | |
가족 | 배우자 김덕신, 슬하 2남 1녀 |
종교 | |
학력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5 |
의원 대수 | |
1. 개요 [편집]
2. 가족 [편집]
3. 정치 입문 전 [편집]
4. 정치 이력 [편집]
아버지 정일형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1977년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그해 6월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1978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 민주공화당 민관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윤형의 자주구락부 계보에 속하였으며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다.
1980년 5.17 내란 후 신군부로부터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2년 미국 미주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하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신한민주당 이민우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화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 대선 직후 야권이 패배한 주요 원인이 후보 단일화 실패에 있었음을 지적하는 ‘나의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평화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 국회 문화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문화공보위원장으로서 5공 청문회를 통해 1980년의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에 대한 진상 규명에 노력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1991년 광역의회선거 참패 후 노승환, 조윤형 등과 함께 김대중 총재의 2선 퇴진과 야권통합을 촉구하는 ‘정치발전연구회(약칭 정발연)’ 모임을 주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하였다. 그리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기도 했다.[9] 1998년 KBO 총재에 취임하였으나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면서 곧 사퇴하였다.[10]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8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다시 선출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말 열린우리당 분당 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004년 1월 소위 '굿모닝시티 로비 사건'으로 인하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면서 10년간 피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노계와는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그 후 지역구를 장남 호준에게 물려주고 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2016년 1월 탈당, 안철수가 주도하는 국민의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들은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했다...가 결국 국민의당으로 갔다.
이후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권노갑, 이훈평 등과 함께 동교동계의 원로로 있었으나, 통합을 추진하는 안철수 대표에 반발하여 동교동계의 원로들과 함께 민주평화당의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2019년 현재는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으며, 당내에서 정동영을 위시한 당권파와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한 비당권파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고문단 중재안을 내놓는 등 당내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9월 20일 권노갑과 본인을 포함해 당 고문단이 집단 탈당한 뒤 무소속 상태로 유지하였으나 권노갑 전 의원과 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선언을 했다.
1980년 5.17 내란 후 신군부로부터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2년 미국 미주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하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신한민주당 이민우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화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 대선 직후 야권이 패배한 주요 원인이 후보 단일화 실패에 있었음을 지적하는 ‘나의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평화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 국회 문화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문화공보위원장으로서 5공 청문회를 통해 1980년의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에 대한 진상 규명에 노력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1991년 광역의회선거 참패 후 노승환, 조윤형 등과 함께 김대중 총재의 2선 퇴진과 야권통합을 촉구하는 ‘정치발전연구회(약칭 정발연)’ 모임을 주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하였다. 그리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기도 했다.[9] 1998년 KBO 총재에 취임하였으나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면서 곧 사퇴하였다.[10]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8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다시 선출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말 열린우리당 분당 때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2004년 1월 소위 '굿모닝시티 로비 사건'으로 인하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면서 10년간 피선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노계와는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그 후 지역구를 장남 호준에게 물려주고 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2016년 1월 탈당, 안철수가 주도하는 국민의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들은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했다...가 결국 국민의당으로 갔다.
이후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권노갑, 이훈평 등과 함께 동교동계의 원로로 있었으나, 통합을 추진하는 안철수 대표에 반발하여 동교동계의 원로들과 함께 민주평화당의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2019년 현재는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으며, 당내에서 정동영을 위시한 당권파와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한 비당권파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고문단 중재안을 내놓는 등 당내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9월 20일 권노갑과 본인을 포함해 당 고문단이 집단 탈당한 뒤 무소속 상태로 유지하였으나 권노갑 전 의원과 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선언을 했다.
5. 여담 [편집]
6. 선거이력 [편집]
7. 소속 정당 [편집]
소속 | 기간 | 비고 |
1973 - 1978 | 정계 입문 | |
1978 - 1980 | 입당 | |
1980 - 1985 | 정당 해산 | |
1985 - 1987 | 창당 | |
1987 | 탈당 | |
1987 | 창당 | |
1987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1987 - 1991 | 창당 | |
1991 | 당명 변경 | |
1991 - 1995 | 합당[14] | |
1995 |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1995 - 2000 | 창당 | |
2000 - 2003 | 합당[15] | |
2003 |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2003 - 2007 | 창당 | |
2007 - 2008 | 합당[16] | |
2008 | 합당[17] | |
2008 - 2011 | 당명 변경 | |
2011 - 2013 | 합당[18] | |
2013 - 2014 | 당명 변경 | |
2014 - 2015 | 합당[19] | |
2015 - 2016 | 당명 변경 | |
2016 | 국민의당 합류를 위한 탈당 | |
2016 - 2018 | 창당 | |
2018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2018 - 2019 | 창당 정계 은퇴 | |
2019 -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8. 관련 문서 [편집]
9. 둘러보기 [편집]
[A] 임기 중 작고[B] 국회의원 자격정지[C] 3.1 3.2 종로구·중구의 제12대 국회의원[5] 더불어민주당 복당 선언을 할 때의 모습.[6]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7] 58회 졸업생이다. 동기동창으로는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 김준기 동부그룹 창업주, 임창렬 경기도지사, 신명호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 최인기 농림수산부 장관,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 이재정 성공회대 총장등이 있다.[8] 원래 이회창의 경제참모였던 이헌재를 대선 직후 김대중에게 추천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후 이헌재는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에서 줄곧 중용된다. [9] 이때 정대철을 지원한 것이 김상현. 김상현은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김대중 총재에 맞서기도 했다.[10] 그러나 이는 훗날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 파기환송된다.[11] 전임자 정일형 의원직 상실 및 전임자 장기영 작고. 당시 국회는 중대선거구제였는데, 우연히도 서울 1선거구 의원 2명이 동시에 공석이 되었다. 정대철과 함께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오제도이다.[12] 서울 1선거구는 종로구와 중구를 관할했다.[13] 1978년 신민당 입당[14] 민주당과 신설 합당[1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6]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17] 민주당과 신설 합당[18]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9]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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