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좌(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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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3. 임인사화 연루 및 사망 [편집]
1722년(경종 2년) 3월에 일어난 임인사화 때 소론 편에 선 지관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 우6인이 경종을 살해하고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8대손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칼, 독약, 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노론 3장신(三將臣)[6]의 한 사람이었던 작은할아버지 이홍술까지 여기에 엮였다.
이 때 이명좌도 체포당해 혹독한 심문을 당한다. 그 해 8월 17일 추문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왕을 죽이려 했다는 자복을 하였고, 그 날 바로 참수형을 당했다. 향년 42세. 이 때 이명좌 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이홍술 등 다른 덕흥대원군 후손들도 많이 엮여 죽었으며 남은 일가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 때가 도정궁 종가의 최대 위기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명으로 신원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도정궁 사손 지위를 돌려주지는 못했고 대신 동생 이명회가 잇게 하였다. 대신 200여 년이 지난 1900년(광무 4년)에 고종의 명으로 이명좌의 넷째 동생 이명익[7]의 5대손 이재철(李載哲)에게 이명좌 개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명회(1685) 참조.
이 때 이명좌도 체포당해 혹독한 심문을 당한다. 그 해 8월 17일 추문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왕을 죽이려 했다는 자복을 하였고, 그 날 바로 참수형을 당했다. 향년 42세. 이 때 이명좌 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이홍술 등 다른 덕흥대원군 후손들도 많이 엮여 죽었으며 남은 일가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 때가 도정궁 종가의 최대 위기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명으로 신원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도정궁 사손 지위를 돌려주지는 못했고 대신 동생 이명회가 잇게 하였다. 대신 200여 년이 지난 1900년(광무 4년)에 고종의 명으로 이명좌의 넷째 동생 이명익[7]의 5대손 이재철(李載哲)에게 이명좌 개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명회(16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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