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고려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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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0대 대왕 靖宗 容惠大王 정종 용혜대왕 | ||
묘호 | 정종(靖宗) | |
시호 |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 (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1] | |
군호 | 평양군(平壤君) | |
절일 | 장령절(長齡節) | |
성씨 | 왕(王) | |
휘 | 형(亨) | |
자 | 신조(申照) | |
왕후 | 용신왕후(容信王后), 용의왕후(容懿王后), 용목왕후(容穆王后) | |
부왕 | ||
모후 | 원성왕태후(元成王太后) | |
능호 | 주릉(周陵) | |
출생지 | ||
사망지 | ||
생몰연도 | 음력 | |
양력 | ||
재위기간 | 음력 | 1034년 9월 17일 ~ 1046년 5월 18일 |
양력 | 1034년 10월 30일 ~ 1046년 6월 24일 (11년 8개월) | |
1. 소개 [편집]
2. 칭호 [편집]
묘호는 정종(靖宗)으로 고려 제3대 임금인 정종(定宗)과 발음이 같다.
시호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다른 고려 군주들도 비슷비슷하지만 조금 심한 편이다.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시호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다른 고려 군주들도 비슷비슷하지만 조금 심한 편이다.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
고려사 정종 세가 마지막 조:
- 문경영렬홍효용혜대왕(文敬英烈弘孝容惠大王)
인종의 책문[5]:
- 정종(靖宗) 영렬홍효안의헌경명양환원용혜대왕(英烈弘孝安義獻敬明襄桓元容惠大王)
동문선에는 고려 당시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책문이 남아 있는데 제목이 '제4실 책문' 이라 누가 올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도(西都)의 난'을 제압했다고 하니 인종이 올린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듯 여러 가지의 시호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올린 첫 시호다. 그래서 시호를 줄여 부르면 다음 왕 문종이 올린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 더 줄이면 정종 용혜왕(靖宗 容惠王)이 된다.
정종 재위기인 1044년에 세워진 '보현사 석탑'의 비문에 '황제폐하(皇帝陛下)'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황제는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대우하던 요나라나 북송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외왕내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만큼 정종을 가리킨 것일 가능성도 높다.
이렇듯 여러 가지의 시호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올린 첫 시호다. 그래서 시호를 줄여 부르면 다음 왕 문종이 올린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 더 줄이면 정종 용혜왕(靖宗 容惠王)이 된다.
정종 재위기인 1044년에 세워진 '보현사 석탑'의 비문에 '황제폐하(皇帝陛下)'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황제는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대우하던 요나라나 북송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외왕내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만큼 정종을 가리킨 것일 가능성도 높다.
3. 생애 [편집]
3.1. 즉위 전 [편집]
3.2. 즉위 후 [편집]
3.2.1. 외치 [편집]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임기 초에는 선대 왕인 덕종의 대거란 강경 외교 방침을 계승해나간다. 단적으로 1035년 5월에 거란이 3가지 요구를 해왔는데
1. 너희 형이 우리랑 단교한거 다시 시작해라.
2. 장성 쌓지 마라.[10]
3. 이상 조건 안지키면 전쟁이다.
이에 대해 다음 달 6월에 정종이 답변했고 내용은:
1. 사신 보낼거 다 보내고 있는데 뭘 더 보내냐.
2. 성은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보낸 사신 6명 억류한거나 돌려 보내라.
3. 협박하냐?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11]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 정책은 유지해 1044년에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하여튼 당대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거란의 요나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고려가 인식되자 이후 고려는 신봉루(神鳳樓)[12]에서 사면령을 내리고 동번 여진, 서번 여진, 탐라, 왜 등에게 사실상 조공을 받는 등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1. 너희 형이 우리랑 단교한거 다시 시작해라.
2. 장성 쌓지 마라.[10]
3. 이상 조건 안지키면 전쟁이다.
이에 대해 다음 달 6월에 정종이 답변했고 내용은:
1. 사신 보낼거 다 보내고 있는데 뭘 더 보내냐.
2. 성은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보낸 사신 6명 억류한거나 돌려 보내라.
3. 협박하냐?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11]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 정책은 유지해 1044년에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하여튼 당대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거란의 요나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고려가 인식되자 이후 고려는 신봉루(神鳳樓)[12]에서 사면령을 내리고 동번 여진, 서번 여진, 탐라, 왜 등에게 사실상 조공을 받는 등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3.2.2. 내치 [편집]
외교 문제를 정리한 뒤 내정에 힘을 쏟은 그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했다. 요는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라는 내용. 다만 이건 정종의 실책 또는 악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남성 양민이 힘없는 여성 노비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하지만 조선의 세종, 영조도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였고 유지하였다.[13]
1036년에는 한 집안에 아들이 넷 있을 경우 그 중 한명은 출가하여 중이 될 수 있도록 했다. 1045년, 악공과 각 관아의 말단 이속에 속하는 잡류, 그리고 오역과 오천, 불충, 불효한 자와 향과 부곡인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오역은 부모를 죽인 자, 파계하였거나 수행하는 사람을 죽인 자, 출가하여 몸에 피를 묻히는 자 등을 말한다. 1046년에는 장자 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또한 도량형의 규격을 새로 마련하여 세금 수취의 폐단을 막도록 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시중 최제안에게 명해 구정에 배향하고 개경 길가에 승려들이 불경을 암송하여 백성들의 복을 비는 행사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이를 경행이라 하는데 그 뒤로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열렸다.
1036년에는 한 집안에 아들이 넷 있을 경우 그 중 한명은 출가하여 중이 될 수 있도록 했다. 1045년, 악공과 각 관아의 말단 이속에 속하는 잡류, 그리고 오역과 오천, 불충, 불효한 자와 향과 부곡인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오역은 부모를 죽인 자, 파계하였거나 수행하는 사람을 죽인 자, 출가하여 몸에 피를 묻히는 자 등을 말한다. 1046년에는 장자 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또한 도량형의 규격을 새로 마련하여 세금 수취의 폐단을 막도록 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시중 최제안에게 명해 구정에 배향하고 개경 길가에 승려들이 불경을 암송하여 백성들의 복을 비는 행사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이를 경행이라 하는데 그 뒤로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열렸다.
3.3. 붕어 [편집]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진에 관한 기록을 보면 1035년 6월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8~9월에는 서울과 경주 지방 19개 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듬해 6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가옥이 훼손되었고 동경에서는 3일이 지나서야 멎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이 국가의 근간이었던 고려인데 비가 잘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어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 기도했고 반찬 수를 줄이고 이같은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탓이라고 자책하여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년만에 29살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 형인 선군(先君)이 그랬듯이 동생인 낙랑군 휘를 부른 뒤 유조를 통해 왕위를 넘겼고 다음 날인 5월 18일에 붕어했다.
정종이 형인 덕종과 다르게 후사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태조의 유훈을 따르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문종이 그냥 왕족으로 두기 아까울 정도로 성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형제가 형제애가 각별하고 진정으로 고려를 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종은 문종에게 선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 형인 선군(先君)이 그랬듯이 동생인 낙랑군 휘를 부른 뒤 유조를 통해 왕위를 넘겼고 다음 날인 5월 18일에 붕어했다.
정종이 형인 덕종과 다르게 후사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태조의 유훈을 따르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문종이 그냥 왕족으로 두기 아까울 정도로 성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형제가 형제애가 각별하고 진정으로 고려를 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종은 문종에게 선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짐(朕)은 선군(先君)의 마지막 명령(末命)을 받들어 누성(累聖)의 비도(丕圖)를 이었으니 12재(載)가 지났다.
하늘의 돌봄 덕분에 국내(國內)가 편안했으나, 이번 계절에 들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약석(藥石)이 무효(無效)하니 결국 대참(漸)에 이르렀다.
바라는 것은 신기(神器)를 유덕(有德)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내사령(內史令) 낙랑군(樂浪君) 휘(徽)는 짐(朕)이 사랑하는 아우이니라. 지극한 효성과 어진 성품에 검소하고 공손해 인국(隣國)에까지 알려졌으니 마땅히 대보(大寶)를 맡아 성덕의 빛을 나타내라.고려사 정종 세가 중 정종의 유조.
4. 평가 [편집]
여말 유학자 이제현이 정종을 평하길:
"현종은 어려운 시기에 반정(反正)을 일으킨지라 외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덕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지라 전쟁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왕가도[14]가 거란과 관계를 단절하자고 한 주장은, 화친을 유지함으로써 평화를 지키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15]의 주장보다 한 수 낮은 것이었다.
정종이 보위를 계승한지 3년만에 우리의 대부(大夫)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갔고, 이듬해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우리나라에 옴으로써 다시 외교가 회복되었다.
(거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기묘한 책략으로 움직인 것이다. 군자가 말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했다.'인 것이다."- 고려사 정종 세가 논평 중.
라 하며 거란과의 전후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를 칭찬하였다. 여요전쟁 이후 거란은 노골적으로 고려를 경계했고, 고려 또한 흥료국 사건이 터지자 참지정사 곽원의 북벌이 시도되는 등 양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평장사 왕가도는 유소와 함께 거란의 성을 부수자고 주장하는 등 덕종 대에도 긴장감이 계속 이어졌고 이는 정종 대에도 천리장성 문제로 마찰이 이어진다. 이 불편한 기류를 그나마 진정시킨 것은 정종으로 이제현의 말마따나 진심으로 거란을 따르지 않되 화친을 이루었다.
정종은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가 확고해지게 한 군주로 신봉루 하례 행사를 계획 및 제도화한 인물이다. 고려의 세번째 대문[16]이자 가장 화려한 누각인 신봉루에서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 고려 각지에 조공 받고 천하에 사면령을 선포[17]하는 행사가 아예 왕실 공식 행사로 박히면서[18] 고려는 승전국으로서의 국격을 크게 선전하며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정종은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가 확고해지게 한 군주로 신봉루 하례 행사를 계획 및 제도화한 인물이다. 고려의 세번째 대문[16]이자 가장 화려한 누각인 신봉루에서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 고려 각지에 조공 받고 천하에 사면령을 선포[17]하는 행사가 아예 왕실 공식 행사로 박히면서[18] 고려는 승전국으로서의 국격을 크게 선전하며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5. 왕릉 [편집]
정종의 무덤인 주릉은 2016년에 형인 덕종의 숙릉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정비된 후의 사진
파일:고려 10대 정종 주릉.jpg
파일:고려 10대 정종 주릉.jpg
6. 태묘 악장 [편집]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정종 왕형의 찬가 제목은 "원화(元和)"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예종 대 정종 왕형의 찬가 제목은 "원화(元和)"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7. 기타 [편집]
- 사실 정종의 재위 기간은 유독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많던 시기였다. 비가 제때 내리지 않아 죄수를 사면하거나 본인의 반찬수를 줄이는 등 정종이 심적 부담을 받은 기록도 나온다. 지진 크리도 잦아 1035년 6월에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8월과 9월에는 개경과 동경(현 경주시) 지방의 19개 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다음 해인 1036년 6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들이 무너졌으며 이중 동경에서 일어난 지진은 3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다만 일각에선 자연재해 기록이 많다는건 역설적으로 기록이 부족하거나 의외로 왕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사관들은 정치가 시끄러우면 자연재해보다 그것에 중점을 둬서 기록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 황성 동쪽에 있던 큰 호수 동지(東池)는 고려국왕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정종은 이 곳에서 기르던 진귀한 동물을 모두 풀어줘 비용을 줄이고, 사치를 멀리 하고자 했다.
-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자 몰번회토(沒蕃懷土), 즉 고려의 제후국 땅에서 잡혀온 사람 80여명에게 의복을 제공했다고 한다.
[1] 고려사 정종 총서 기준.[2] 정종이 태어난 해에 현종은 개성부를 폐지해 중경과 합쳤다.[3] 고려사 원문엔 대내법운사(大內法雲寺)라고 했다. 즉 법운사는 궁 내에 있었다는 뜻이다.[4] 이는 통일 신라 시기도 비슷하다.[5] 추정. 동문선 28권 기록.[6] 현화사가 완공된 해이기도 하다.[7] 직명은 내의령 → 내사령 → 중서령 순으로 바뀌었다.[8] 부서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9] 정전을 제외한 궁궐의 전각 중 가장 많이 활용된 편전이다. 아버지 현종이 붕어한 곳이기도 하다.[10] 덕종이 쌓기 시작한 성으로 원문은 석성(石城)이라고 지칭했다. 거란 입장에선 저런 기다란 석성이 쌓여지면 위협적이니 엄청 싫어했다.[11] 원문은 사보희언似涉戱言. "마치 흘러가는듯한 우스운 발언"이란 뜻이다.[12] 고려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다음의 문이다. 신봉문은 이중루였으며 위 누각을 신봉루라하였다. 고려사, 고려도경이 기록한 가장 화려한 누각이었으며 누각 남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고려국왕이 사열식, 팔관회, 사면령, 과거 등을 실시하였다. 신봉루의 간판은 붉은 색 바탕에 황금색 글자를 새겨 천자국으로서의 위용을 펼쳤다.[13] 다만 고려 때는 통상적으로 일천즉천(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의 원칙이 적용되었기에 확인이 필요한 부분. 사실 노비 소유권(일명 천자수모법)이나 자식의 신분 문제는 조선 때까지도 갑론을박과 수정이 쭉 이어졌을만큼 복잡한 문제이다.[14] 만월대의 나성을 완성시킨 인물로 거란의 성을 처부수자고 선공을 원했던 매파 관료이다.[15] 목종과 현종의 신하로, 말로 풀자는 비둘기파였다.[16] 천자국은 궁궐의 정전으로 가는 문을 5개로 만들 수 있다. 고려는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으로 5문을 만들었다.[17] 이것을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다.[18] 고려사 예지 의봉문선사서의조에 이 행사의 준비과정이 기록되어 있다.[19]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천리장성.[20] 실제로도 정종의 배향공신을 보면 해동공자 최충, 7대사적 편찬자 황주량, 이천 서씨 재상 서눌, 경주 김씨 대표 김원충 같은 쟁쟁한 인물만 뽑혀있다.[21] 이 문제는 천자식과 제후식 제도를 절충한 5묘 9실제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후 의종이 7묘 9실제라는 완전한 천자식 제도를 도입하면서 해결된다.[22]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한언공의 아들.[23] 황금색 의복. 고려국왕이 입던 황포(黃袍) 중 하나다.[24] 만월대 나성 안에 있었던 사찰. 광종이 지은 곳으로 효사관이란 건물을 추가로 지어 태조의 어진을 안치했다.[25] 고려사 정종 세가 재위 4년 2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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