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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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영삼사 종부시사 마전군 귀의군 왕우 | |
시호 | 경희(景禧) |
작위 | 정양군(定陽君)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 귀의군(歸義君) |
본관 | |
휘 | 우(瑀) |
생몰년도 | ?~1397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형 장창부원군 왕요가 왕위에 오른 1389년 겨울, 우왕과 창왕이 서인으로 강등되고 왕의 장인 이림(李琳)과 일가족이 유배보내질 때에 정양군 왕우는 군사를 이끌고 개성 인근의 장단에 주둔해 유사시에 대비했다. 형이 즉위한 해에 부원군 판문하를 거쳐 영삼사 종부시사의 관직에 오른다. 공양왕이 4대조를 추숭하자 형을 대신해 제사를 맡기도 했다. 1390년에는 공양왕 즉위 9공신의 일원인 지용기가 충선왕의 서증손 왕익부(王益富)를 집에 들이며 내통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다. 1391년 영삼사사에 올랐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는 나라에 공이 있는 왕승(王昇)과 그 후손, 그리고 고려 왕조의 제사를 지낼 왕우와 그 후손은 섬에 보내지 않고 남겨두라고 명한다. 왕우는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받고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현재의 연천군 미산면 일대)의 앙암사(仰庵寺, 현재 연천 숭의전지)에서 왕씨의 제사를 지낸다. 태조는 왕우와 격구를 즐기면서 왕우를 마전군에 봉한 까닭을 설명하는데, 둘이 사돈 관계라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주나라에서 미자를 송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고 한다. 왕우의 아들들은 외가 성인 노씨로 성을 갈았다.
1394년 왕씨의 역모 사건에 왕우도 표적이 됐다. 왕화와 박위 등의 국문에서 정양군, 즉 왕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여러 신하가 왕우와 두 아들을 섬으로 보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는 매번 '고려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삼부자를 사면했다. 계속되는 탄핵 속에서 1397년에 죽으니 예장하고 경희(景僖)의 시호를 받았다. [1]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는 나라에 공이 있는 왕승(王昇)과 그 후손, 그리고 고려 왕조의 제사를 지낼 왕우와 그 후손은 섬에 보내지 않고 남겨두라고 명한다. 왕우는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받고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현재의 연천군 미산면 일대)의 앙암사(仰庵寺, 현재 연천 숭의전지)에서 왕씨의 제사를 지낸다. 태조는 왕우와 격구를 즐기면서 왕우를 마전군에 봉한 까닭을 설명하는데, 둘이 사돈 관계라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주나라에서 미자를 송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고 한다. 왕우의 아들들은 외가 성인 노씨로 성을 갈았다.
1394년 왕씨의 역모 사건에 왕우도 표적이 됐다. 왕화와 박위 등의 국문에서 정양군, 즉 왕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여러 신하가 왕우와 두 아들을 섬으로 보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는 매번 '고려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삼부자를 사면했다. 계속되는 탄핵 속에서 1397년에 죽으니 예장하고 경희(景僖)의 시호를 받았다. [1]
3. 가족관계 [편집]
- 왕우
- 처: 노씨(盧氏)
3.1. 자녀 [편집]
- 장남: 정강군(定康君) 왕조(王珇)
- 차남: 왕관(王琯)
- 여: 경녕옹주 왕씨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의 처. 삼한국대부인이라고도 한다. 태종으로부터 쌀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경녕옹주는 태조실록 왕우의 졸기에서 보이는 유일한 딸이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보다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 여: 개성 왕씨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의 처. 박석명은 왕우의 사위였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는 8년동안 관직에 공백이 있었다. 태종 시기부터 좌승지로 다시 관직 생활을 이어간다. - 여: 개성 왕씨 #
순녕군(順寧君) 이덕근(李德根)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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