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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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2. 상어의궁(上於義宮)3. 하어의궁(下於義宮)4. 현존하는 문화재

1. 개요 [편집]

於義宮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잠저[1]이며 효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의궁은 다른 별궁들과 다르게 상어의궁과 하어의궁으로 나뉘었다. 여기서는 각각 정리해 살펴보도록 한다.

2. 상어의궁(上於義宮) [편집]

인조의 잠저이다. 한성부 중부 경행방,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일대에 있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유지명잠룡지(有池名潛龍池)'라 하여 이 곳에 잠룡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한다. 인조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으로 태어나 쭉 아버지의 집 송현궁[2]에서 살다가 훗날 인열왕후가 되는 한씨 부인과 혼인 직후 따로 나와 향교동에 정착했고 이 곳에서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을 낳았다.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면서, 능양군이 살던 집은 어의궁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가 폐궁시켰고, 인조의 어휘 등을 봉안하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

1756년(영조 32년) 영조가 이 곳 봉안각에 배례하고 현판 '인묘고궁(仁廟古宮)'을 걸게 한 것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어의궁 관련 기록이다. 현재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으며 궁의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3. 하어의궁(下於義宮) [편집]

하어의궁 터 안내판
효종의 잠저이다. 효종도 아버지 인조와 마찬가지로 원래 이 될 왕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궁 밖에서 살아야 했다. 봉림대군 시절 훗날 인선왕후가 되는 장씨 부인과 혼인한성부 동부 숭교방, 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연지동 일대[3]에 자리잡고 살았다. 참고로 이 자리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본궁으로 정현왕후 소생인 중종의 잠저이기도 했다.
《인평대군 방전도》에 나온 하어의궁의 모습.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봉림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곧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의 옛 사저는 어의궁으로 불렸고, 이 때부터 인조가 살았던 옛 어의궁은 상어의궁, 봉림대군이 머물렀던 어의궁은 하어의궁이 되었다. 그리고 왕을 배출했다하여 '용흥궁(龍興宮)'[4]으로도 불렀다. 숙종은 이 곳에 현판 '용흥구궁(龍興舊宮)'을 남겼다. 이후 주로 왕실의 사적 재산을 조달 및 관리하고, 왕세자가례를 올리는 별궁으로 기능했다. (가례 자체는 인조장렬왕후의 친영[5]부터 시작해서, 이후 숙종인현왕후, 영조정순왕후도 이 곳에서 가례를 치뤘다.) 그러다 1907년(융희 원년) 궁내부령으로 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폐지하고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어의궁도 황실 재산에서 국가 재산이 되었다.# 이후 헐려 현재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조양루(朝陽樓)로도 불렸는데 낙산 서쪽에 있어 아침볕을 잘 받아서 붙힌 별칭이다. 효종동생 인평대군의 집과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인평대군 집은 반대로 저녁볕을 잘 받아서 석양루(夕陽樓)로 불렸다고.

4. 현존하는 문화재 [편집]

현재는 한국은행의 후문 앞에 위치한 하마비가 유일하게 남아있다.[6] 1950년도까지는 어의궁 석어당(조양루)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이후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 공식 후계자가 아닌 왕족이 되기 전 살았던 .[2] 훗날의 저경궁이다.[3] 대학로 쪽이다.[4] 철종강화도 잠저와는 이름만 같다.[5]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절차.[6]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1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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