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말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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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원나라 중서원외랑 석말천구는 음력 1275년 12월 임기 3년의 부다루가치로 충원되어 고려에 온다. 같은 해 2월 부다루가치 주세창(周世昌)이 죽은 뒤 약 10개월만의 일이다.
임기 1년차에 맞은 1276년 새해에 충렬왕의 신년 하례가 있었고, 다루가치 석말천구는 흔도와 함께 말을 바친다. 7월 다루가치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의 임기가 끝난다. 다음날 원에서 온 사신이 석말천구의 죄를 물었는데 불복해서 수감됐다가 충렬왕이 박구를 보내 설득하니 풀려난다.
임기 1년차에 맞은 1276년 새해에 충렬왕의 신년 하례가 있었고, 다루가치 석말천구는 흔도와 함께 말을 바친다. 7월 다루가치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의 임기가 끝난다. 다음날 원에서 온 사신이 석말천구의 죄를 물었는데 불복해서 수감됐다가 충렬왕이 박구를 보내 설득하니 풀려난다.
정언(正言) 이인정(李仁挺) 등 백여명이 다루가치를 죽이려고 한다.[3]
1276년 12월 석말천구의 관사에 익명서가 던져진다. 석말천구는 정화궁주와 제안공, 김방경 등을 가두고 문초했고 이인정은 칼과 족쇄를 찼다, 류경(柳璥)이 눈물을 흘리며 진실되게 변호해 궁주와 왕자 등은 풀려났으며, 이인정의 무고함도 밝혀져 풀려난다.
고려에서는 40여명의 명단에 이미 죽은 인물도 있었음을 들며 익명서의 내용은 근거가 없는 망언임을 원에 알린다. 그러나 원에서는 혹시 익명서의 내용이 사실일까 걱정했다. 1277년 1월 다루가치 석말천구는 원 추밀원에서 민간인이 활과 화살을 갖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이를 따른다. 2월에는 충렬왕이 현명한 선비들을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린다고 책망했는데, 무뢰배는 위의 익명서에 포함된 신하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277년 12월 김방경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자 흔도와 함께 김방경을 심문했다. 1278년 9월 원으로 귀국하는 길에 충렬왕을 알현했다. 석말천구는 계권(契券), 해유(解由) 등 공문서에 칭찬이나 미담(褒美)을 덧붙여줄 것을 부탁했는데, 잘한 게 없다고 해서 생략했다.
3. 광릉 석말씨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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