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락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서상락(徐相洛)
이명
서영윤(徐永潤), 서영림(徐永林)
본관
생몰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중면
(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1]
사망지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서상락은 1893년 3월 2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중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18년 1월 만주 통화현(通化縣)[2]에 있는 신흥강습소를 졸업한 뒤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학생인 김원봉, 김옥(金玉) 등과 친분을 맺고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 파호문에서 김원봉, 이종암 등 12명의 동지와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고 김원봉을 단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서상락은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 일본군 장교, 친일부역배 등을 주살하고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1919년 11월 9일 중국에서 국내로 폭탄을 반입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을 폭파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황상규, 곽재기 등과 함께 폭탄 13개, 권총 2정을 반입시키고 1920년 6월 밀양경찰서를 폭파시키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자, 그는 급히 중국 동삼성으로 피신했다.

1920년 봄, 서상락은 의열단원 신철휴와 함께 미리 국내에서 모집해 둔 군자금 2,000원을 의열단에 제공했다. 그리고 1922년 4월에 상하이 법계 융파로 수길리에 의열단 본부가 이전되었을 때 재호(沪)단장이 되었으며, 그해 여름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독일로 가서 베를린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23년 5월 28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193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편찬한 『국외용의조선인명부(國外容疑朝鮮人名簿)』에 서상락이 등재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에선 그의 사망 사실을 당시까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서상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서오룡도 이 마을 출신이다. 산격동 산79-1번지에는 산격동 입향조인 서침(徐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구암서원이 있다.[2] 통화현은 지금의 중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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