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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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왕과 왕족 [편집]
부여/왕사 참조.
- 대소왕의 족제(가칭): 대소왕이 대무신왕과의 싸움에서 패사한 뒤 고구려로 항복했다. 항복 이후, 낙씨(絡氏) 성을 하사받았다.
3. 관료 [편집]
- 위거의 계부: 이름은 불명. 그가 딴마음을 먹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서 관청에 보냈다고 한다.
4. 고구려, 백제 관련인물 [편집]
5. 갈사국 관련인물 [편집]
6. 기타 [편집]
6.1. 번외: 중국 북조에서 활약한 여(餘)씨 관련 인물 [편집]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뒤에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하는 인물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 유민으로 보았다.[3]다만 여울(부여)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부여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를 제외한 여씨 인물들은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 여울(부여): 항목 참조.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한다.
-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에서 서중랑장을 지내다가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게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5]
[1] 위치미상. '가섭'이라는 단어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두타제일을 일컫는 말인 점과 동부여의 실존여부도 논란이 있어 확실치 않다.[2] 다만 생전 실제 호칭이 부여태후였던 것은 아니고, 부여태후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그녀가 부여 출신 왕태후라는 점 때문에 임의적으로 붙인 호칭이다.[3]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총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4] 모용농은 이후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5]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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