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관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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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이미 죽은 사람의 죄상이 드러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극형을 내리는 걸 말한다.[1] 일종의 고인능욕. 즉 이미 죽은 사람을 한 번 더 죽이는 형벌. 죽은 후에 정치적인 이유, 혹은 살아있을 당시에 그 위세에 눌려 죄목을 따지지 못했을 경우에도 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선시대 사화에 벌어졌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 때 권세를 잡고 독재정치를 펼쳤던 올리버 크롬웰이다.
시체의 목을 베기 때문에 부관참두(剖棺斬頭) 혹은 육시효수(戮屍梟首)라고도 불린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산 채로 살을 발라내어 사형시키는 형벌인 능지처참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2. 상세 [편집]
사실 의학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의 몸에 무슨 짓을 한다고 해서 당사자는 이미 죽은 몸이니 당연히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므로 이성적으로 보자면 정말 쓸데없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이렇게 시체 훼손을 하는 행위는 당사자보다는 이 행위로 인해 어떤 방향으로든 정신적 영향을 받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2] 일종의 쇼맨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부관참시는 실질적인 형벌로서가 아닌 정치적인 행위 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시체훼손은 금기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이렇게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되도록 금기시하는 편으로, 시체 훼손 행위를 해당 시체의 주인인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다 해서 법으로도 금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관참시는 정치적 리스크가 상당히 큰 행위로 부관참시를 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쥘 수가 있을만큼 강하거나 시체 주인이 알고 보니 굉장히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부관참시를 하는 그 시점에서 해당 세력이 역풍을 맞을 일은 거의 없는데, 이 시점은 정치상황이 빠르게 변해서 새 체제가 완전히 들어섰거나 누군가 반란 등에 실패해서 기존 체제가 더욱 견고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애초에 부관참시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세력이 역풍 따위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시체훼손은 금기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이렇게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되도록 금기시하는 편으로, 시체 훼손 행위를 해당 시체의 주인인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다 해서 법으로도 금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관참시는 정치적 리스크가 상당히 큰 행위로 부관참시를 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쥘 수가 있을만큼 강하거나 시체 주인이 알고 보니 굉장히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부관참시를 하는 그 시점에서 해당 세력이 역풍을 맞을 일은 거의 없는데, 이 시점은 정치상황이 빠르게 변해서 새 체제가 완전히 들어섰거나 누군가 반란 등에 실패해서 기존 체제가 더욱 견고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애초에 부관참시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세력이 역풍 따위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3. 한국사의 경우 [편집]
신라의 반란자 김헌창은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으나 웅진성이 포위되고 패색이 짙자 자결하고 부하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베어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군은 김헌창의 시체를 수색해 모아서 다시 베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삼국사기의 편찬자이자 저명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1170년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 묘가 파헤쳐진 뒤 부관참시 당했는데, 일전에 인종 때 그와 그의 아들인 김돈중이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먹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신들이 김돈중을 처참히 죽인 뒤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의 시신마저 묘에서 꺼내 무참히 시신을 토막내버렸다고 한다.
부관참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인데 이것은 패왕 항우에게 결국 왕좌를 넘겨준 초나라 의제를 빗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연산군 4년에 유자광이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는 바람에 일이 터졌다. 결국 김일손, 권오복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거열형을 당했으며, 김종직 자신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묘가 파헤쳐져 시체는 토막나고 효수되었다. 오늘날이면 몰라도 전근대 시절 김종직의 세조에 대한 공격은 비단 연산군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왕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왕실 능멸이었다.
그 밖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과 생육신 중 한사람이었던 남효온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3] 또한 세조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다.
한편 연산군 때 공조판서로 있었고 《용재총화》의 저자이자 세조의 사람이기도 했던 성현도 세상을 떠난 지 수개월 후 일어난 갑자사화에 시체의 목이 달아났다.[4] 그밖에도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이 실록을 뒤져 어머니 윤씨를 폐위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부관참시했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육간(甲子六奸)’이라고 지목한 권신 이극균(좌의정)·이세좌(예조판서)·윤필상·성준·한치형(이상 영의정)·어세겸(좌의정) 모두 끔찍한 화를 입었다. 이들이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록을 보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이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澤) 등의 형벌도 자행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안습.
고려 때에도 삼국사기의 편찬자이자 저명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1170년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 묘가 파헤쳐진 뒤 부관참시 당했는데, 일전에 인종 때 그와 그의 아들인 김돈중이 무장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먹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신들이 김돈중을 처참히 죽인 뒤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의 시신마저 묘에서 꺼내 무참히 시신을 토막내버렸다고 한다.
부관참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인데 이것은 패왕 항우에게 결국 왕좌를 넘겨준 초나라 의제를 빗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것으로, 연산군 4년에 유자광이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는 바람에 일이 터졌다. 결국 김일손, 권오복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거열형을 당했으며, 김종직 자신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묘가 파헤쳐져 시체는 토막나고 효수되었다. 오늘날이면 몰라도 전근대 시절 김종직의 세조에 대한 공격은 비단 연산군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왕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왕실 능멸이었다.
그 밖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과 생육신 중 한사람이었던 남효온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3] 또한 세조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다.
한편 연산군 때 공조판서로 있었고 《용재총화》의 저자이자 세조의 사람이기도 했던 성현도 세상을 떠난 지 수개월 후 일어난 갑자사화에 시체의 목이 달아났다.[4] 그밖에도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이 실록을 뒤져 어머니 윤씨를 폐위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부관참시했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육간(甲子六奸)’이라고 지목한 권신 이극균(좌의정)·이세좌(예조판서)·윤필상·성준·한치형(이상 영의정)·어세겸(좌의정) 모두 끔찍한 화를 입었다. 이들이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록을 보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이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澤) 등의 형벌도 자행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안습.
4. 서양의 경우 [편집]
철기대를 이끌고 청교도 혁명에 승리하여 찰스 1세의 목을 치고, 의회파의 영웅이 된 올리버 크롬웰도 혁명 후 독재정치를 펼치게 된다. 사후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권력을 이양하려 하다가 장로파가 왕정복고를 실행, 찰스 2세를 옹립하면서 한 때 호국경이었던 크롬웰은 왕을 죽였다는 반역자란 죄목이 붙었고 1660년 12월 4일 의회 투표를 통해 크롬웰의 부관참시를 결정한다. 1661년 1월 30일, 그러니까 찰스 1세 처형 12주년 기념일인 바로 그날에 무덤에서 꺼내서 9시간 동안 런던의 교수대에 매달린 후 토막냈다. 시체는 매장 당시 잘 절였기 때문에 그냥은 잘 잘리지도 않아 도끼로 30번을 내리쳤다고 한다. 목은 장대에 꽂혀 웨스트민스터 성당 홀에 걸렸다.
뱀발을 더 붙이자면, 이 크롬웰의 "머리"는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고대 유물처럼 한번 도난 당한 후 300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1960년에 이르러서야 크롬웰의 모교 케임브리지 시드니 서식스 대학에 매장되었다. 크롬웰의 머리가 도난당한 후 떠돌아다닐 때의 일설에 의하면 아이들의 축구공으로 쓰이기도 했다가 쪼개져 템스 강에 버려졌다는 소리도 있었다.
뱀발을 더 붙이자면, 이 크롬웰의 "머리"는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고대 유물처럼 한번 도난 당한 후 300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1960년에 이르러서야 크롬웰의 모교 케임브리지 시드니 서식스 대학에 매장되었다. 크롬웰의 머리가 도난당한 후 떠돌아다닐 때의 일설에 의하면 아이들의 축구공으로 쓰이기도 했다가 쪼개져 템스 강에 버려졌다는 소리도 있었다.
5.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들 [편집]
- 고대 이집트 시대의 미라들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의도와 과정으로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발굴된 미라를 가루로 만들어 가려움증 치료제나 미술 재료, 심지어는 장작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 권전
- 김부식 - 해당 문서 참고.
- 남효온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총살형 당시 집행관들의 증오심으로 인해 사살 후 몇 시간 뒤 또 다시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 루이 15세의 자녀들
- 린썬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묘가 폭파당했고 시체는 소각되었다.
- 만력제 -
우리 입장에선 갓력제지만 객관적으로는명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명 13릉 중 유일하게 지하 무덤을 발굴하는 도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서 홍위병들에 의해 시체가 불태워졌다. 그리고 비가 내려 잿가루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니 나라를 말아먹은 것에 대한 천벌을 받았다는 말이 나올 만 하다. 다만 평가는 평가고 이 때문에 만력제의 체격이나 건강 상태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증거가 영원히 사라졌다. - 미천왕, 미천왕비
- 바르톨로메노 페레티 - 바르바로사에게 부관참시 당했다.
- 사사정
- 아흐마드 알리파이 - 시아파 성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그의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 없애버렸다.
- 악비 - 역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져 유골이 불에 타 가루가 되었다.
- 유관순 - 이장을 앞두고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이 파헤쳐지면서 그녀의 유해가 분실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들이 그녀의 유해를 받들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을 가능성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고 유골이 파괴되었다는 설이 있다.
- 유자광 - 야사에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 부관참시당할 것을 예지해 가짜 무덤을 만들어 피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중종의 반대로 무산됨.
- 응오딘지엠 - 베트남이 통일되자 이미 사망한 남베트남의 장관, 군인 등과 함께 무덤이 파헤쳤고 시체는 소각당함.
- 이세적(이적)
- 임숭재 - 반정군위해 무덤파서 목을 베어 도성거리에 효수해버렸다.
- 정여창
- 조헌 등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의병 - 이들이 묻힌 칠백의총은 일제강점기 말이었던 1940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후 1952년에 칠백의총이 복원되었다.
- 지미 새빌 - 생전에 저지른 성범죄가 밝혀진 후 무덤이 철거되고 시신도 화장되어 유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뿌려졌다.
- 찰리 채플린 -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에게 본인의 무덤이 도굴되었다. 이쪽은 나중에 범인들을 체포하고 유해를 되찾아 다시 안장하면서 좋게 끝났다.
- 캉유웨이 -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거리에 끌고 다녔고 두개골을 조반유리 전시회에 전시해놓았다. 나중에 산둥성 정부가 그의 유골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문화대혁명만 몇번째냐? - 토머스 베케트 - 본래 성인으로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교인이었으나, 헨리 8세가 교회랑 연을 끊으면서 겸사겸사 교회 재산도 털어갈 목적으로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하고는, 30일 이내로 법정에 출두하란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그는 출석하지 않았고, 이후 헨리 8세는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보관 중이던 유해를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깡그리 털어갔다...
- 포송령 - 요재지이 작가.역시 홍위병들에게 무덤에서 꺼내어져 유골이 불에 탔다.
- 현덕왕후 - 세조의 장남 덕종 꿈에서 나타나서 죽게 되자 화가 난 세조는 무덤파서 관을 꺼내 유해는 망치로 부수고 소각해서 강에 버렸다는 내용이 야사에 있다.
6. 비유적 표현 [편집]
이미 당할 대로 당해 재기불능인 것(사망)을 다시 관광보내는 것(참시)을 말한다. 고의적이든 아니든 승자가 패자를 다시 한 번 짓밟는 사례. 한마디로 망했어요를 더 망했어요로 만드는 것.
둘 사이의 대결에서(인기, 가격, 점유율 등등) 한 쪽이 우세한 상황으로 이긴 후 다시 한번 일을 터뜨려(추가인하, 신제품 개발 등) 진 쪽이 재기도 못할정도로 승리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행위.
부관참시는 그 말 자체로, 산 사람인 상대를 '시체'로 비유한다는 뉘앙스가 있어서 사람에 따라 거북하게 받아들일수도 있다.
재기불능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죽은 사람을 비난해서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부관참시라고도 한다. 이쪽은 원래의 부관참시와 상황과 목적이 비슷하다.
둘 사이의 대결에서(인기, 가격, 점유율 등등) 한 쪽이 우세한 상황으로 이긴 후 다시 한번 일을 터뜨려(추가인하, 신제품 개발 등) 진 쪽이 재기도 못할정도로 승리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행위.
부관참시는 그 말 자체로, 산 사람인 상대를 '시체'로 비유한다는 뉘앙스가 있어서 사람에 따라 거북하게 받아들일수도 있다.
재기불능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죽은 사람을 비난해서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부관참시라고도 한다. 이쪽은 원래의 부관참시와 상황과 목적이 비슷하다.
6.1. 사례 [편집]
- 오덕페이트와 액셀러레이터의 대결
- 조 패터노 前 NCAA FBS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헤드코치 - 2011년 11월 '미국판 도가니 사건'이라 불리는 수비코치 제리 샌더스키의 10여년에 걸친 미성년자 성폭행을 총장과 함께 묵인한 죄로 시즌중 사임한 뒤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사망 6개월 후 교내에서 동상이 철거당했으며, NCAA 측에서 패터노 감독 재임기인 1998~2011년까지 대학의 우승전력을 무효화하였다. 위의 네 경우와는 다르게 진짜로 죽고 나서 부관참시. 단 WWE 스타였던 크리스 벤와나 야구, 축구, 농구의 승부조작범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고도 기록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미국에서도 대부분이기에 성범죄 은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박탈은 당연하나 기록부정까지 한 건 지나쳤다는 비판도 있다.
- 스튜디오 딘 - 페스나 본편 애니메이션과 언리미티드 워크스 극장판의 퀄리티가 처참한지라, 유포터블의 페이트 제로, 언리미티드 워크스 애니메이션에 비교되며 두고두고 까였다. 다만 스튜디오 딘의 경우 스폰서의 부재와 타입문의 지원이 부족했고, 거기서도 어떻게든 뽑을건 그럭저럭 뽑았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 페이커&류 제드 미러전 솔킬 - HOT6 Champions Summer 2013 결승 5세트에서 미드라인에서 혼자 스플릿 푸쉬를 하다 타워에 맞아 피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커의 제드를 잡기위해 류의 제드가 선궁을 썼으나 페이커가 화려한 컨트롤로 류를 역관광시켰다. 이 장면은 당시 실시간으로 국내외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잊을 만하면 기사, 칼럼, 롤 명장면 영상 모음 등에서 등장하여 그 때마다 '오늘도 류의 제드는 죽습니다.' '그만해 류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라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죽은 제드' 와 같은 드립이 댓글로 달린다. 이러한 사정으로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이 장면은 꾸준히 조회수가 올라가 2016년 6월 기준 250만 조회수를 넘겼다. 해당 영상.
링크를 클릭하는 순간 류의 제드는 또 한번 죽는다 - 갤럭시 노트7 : 폭발 사고로 인한 단종 이후 고객지원 사이트에서 펫네임을 날려서 그 폰을 없던 폰으로 만들었다. 또한 주기적으로 킬 스위치를 가동하여 인터넷에 연결된 모든 노트7을 영원히 충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쇼미더머니 8 : 방영 당시 쇼미더머니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았고, 하락세를 밟고 있던 쇼미더머니 특성상 재평가가 이루어질 줄 알았으나, 쇼미더머니 9의 흥행으로 최악으로 남게 되었다
6.2. 관련 문서 [편집]
[1] 죄가되기 전에 먼저 죽었을 경우[2] 가해자들에게는 고인을 욕보였다는 만족감, 고인과 연관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각심과 위협감을 불러일으키는 등[3] 남효온은 생전에 소릉 복위를 줄기차게 주장한 탓에 연산의 눈에 찍혔다. 여기서 소릉은 단종의 친모 현덕왕후 권씨의 능으로 세조가 파헤쳤다.[4] 이 집안은 아들 성세창마저 불운에 휩싸였다. 성세창은 명종시기 윤임 일파로 몰려 윤원형의 미움을 사 유배 후 비참하게 죽었다.[5] 북한의 농업상이었으며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도 유학을 다녀왔다. 1945년 로동당 평안남도 안주읍 위원장을 시작으로 북한 정권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53년 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때 평양이 한미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 만경대에 있던 김일성 선친들의 유해들을 옮기기 위해 직접 자원했다. 그는 김일성의 허가를 받아 해군 1개 대대를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며 휴전 후 다시 만수대로 옮겼다. 1959년 최고인민위원회 제2․3․5기 대의원, 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농업위원회 위원장, 부수상, 로동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등 요직을 역임했고 1973년 9월 정무원 부총리 및 농업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가 복귀했다. 1984년 사망하고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6]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 요원들이 평양 용성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 잡혔다는 사건이다. 대표적인 날조극으로 이 때 숙청된 대상도 대부분 고령의 당 간부들이었는데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을 끌어내어 공개처형했다. 이 때 비료를 개인 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로 처형된 중앙당 비서 서관히(서관희) 이외에 2만명이 대량 숙청된 심화조 사건도 있다.[7] 무연고 분묘와 무연고 사망자, 신원미상 변사자의 경우 보통 관할 지자체에서 토지의 소유주나 경찰, 검찰 등 관련자로부터 이전받아 일괄적으로 화장(또는 무연고 묘지에 매장)처리 하며, 일정기간을 보존한 후 다시 일괄적으로 산골처리 한다. 경기도 내 무연고 사망자 유골 보존 기한은 보통 10년이니, 지금쯤 먼지가 되어 산골처리 되었을 듯하다.[8] 일본식으로 장례를 치뤄서 항아리에 납골해놓은 상태였다고. 그말인즉 조선식으로 관에 넣어 묻었다면 실제 부관참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9] 본관이 같은 우봉 이씨지만, 이완용과는 촌수가 멀다.[10] 손자가 이장무 전 서울대학교 총장,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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