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규우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이명 | 남오대(南梧大) |
자 | 명칠(明七) |
본관 | |
출생 | |
사망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승순은 그의 아버지이다.
2. 생애 [편집]
남규우는 1889년 11월 5일 경상도 의성현 점곡면 윤곡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윤이실마을)에서 윤이실마을 입향조이자 정3품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지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9대 종손으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남승순[4]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진락(金津洛)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부친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지시받고 점곡면 사촌동에 살던 황금종에게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후 그는 군중이 집결하자 평암동을 출발해 사촌동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점곡주재소로 행진했다. 그는 주재소를 포위한 뒤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했다.
3월 20일, 일본 경찰은 검거 작전을 펼쳤고, 결국 남규우는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3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67년 3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남규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19년 3월 19일 부친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지시받고 점곡면 사촌동에 살던 황금종에게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후 그는 군중이 집결하자 평암동을 출발해 사촌동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점곡주재소로 행진했다. 그는 주재소를 포위한 뒤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했다.
3월 20일, 일본 경찰은 검거 작전을 펼쳤고, 결국 남규우는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3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67년 3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남규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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