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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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역대 왕조의 남경 [편집]
1.1. 발해 왕조 [편집]
발해의 다섯 중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로 5경 중 유일하게 한반도 안에 있었던 도시이다.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길에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는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길 신라도→남경남해부, 일본으로 가는 길 일본도→동경용원부로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일본으로 갈 때도 남경남해부 루트로 간 적도 있다. [1]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남경남해부의 위치 비정을 처음 시도한 정약용은 함경남도 함흥으로 판단했으며, 그 외 함경북도 경성군이라는 설도 있으며, 북한 학자들은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있는 청해토성을 발굴해 여기를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는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길 신라도→남경남해부, 일본으로 가는 길 일본도→동경용원부로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일본으로 갈 때도 남경남해부 루트로 간 적도 있다. [1]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남경남해부의 위치 비정을 처음 시도한 정약용은 함경남도 함흥으로 판단했으며, 그 외 함경북도 경성군이라는 설도 있으며, 북한 학자들은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있는 청해토성을 발굴해 여기를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다.
1.2. 고려 왕조 [편집]
문종 때인 1067년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에 남경이 설치되었다.[2] 당시 이 지역은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몇 년 뒤 폐지되었다가 고려 숙종 때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고려 후기 충렬왕 34년(1308년) 때 통일신라 때 썼던 지명 한양으로 이름을 되돌렸고 이 해에 동경(경주시)도 계림부로 고치면서 고려의 3경제도가 끝났다.
1356년 기철을 죽이고 반원 개혁에 나선 공민왕은 남경(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남경 천도론은 이후로도 빈번하게 일어나 우왕 때인 1382년(우왕 8년)에 실제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개경으로 복귀했다. 1390년 공양왕도 잠시 천도했다가 이듬해에 개경으로 복귀했다. 고려 말기에 벌어진 천도 움직임은 이후 조선 초 한양 천도에 영향을 주었다.
남경의 지역적 범위는 여러 설이 있는데, 지금의 서울 사대문안, 용산, 신촌 일대로 보는 설도 있고, 더 넓게보아 지금의 구리시, 남양주시 삼패동까지 포괄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부가 되었다.
2. 중국 역대 왕조의 남경 [편집]
2.1. 요나라 (거란) [편집]
2.2. 송나라 (북송) [편집]
2.3. 금나라 (여진) [편집]
2.4. 명나라 [편집]
3. 일본의 남경 [편집]
4. 남자 경찰관 [편집]
5. 대한민국의 배우 [편집]
프로듀사에 출연했던 배우(본명 김선아)는 남경(배우) 문서로.
6. 관련 항목 [편집]
[1] 속일본기 777년 1월에 등장하는 9차 견일본사. 사도몽(史都蒙)을 대사로 하는 이들 발해의 9차 견일본사 선단은 776년에 남경남해부의 토호포(吐虎浦)라는 항구를 출발해 규슈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하필 바람을 잘못 만나서 46명만 살아남고 다 죽었다. 토호포에 대해 남한에서는 북청군이라거나, 함흥의 옛 포구 가운데 도련포(都連浦)라는 포구가 있음을 들어 함흥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북한 학계에서는 지금의 북청군 신창항(新昌港)에 해당한다고 비정하고 있다.[2] 남경 별궁을 지었다.[3] 수도 또는 서울이라는 뜻으로, 베이징 천도 이후 명 중기 ~ 민국 초기까진 경조(京兆)와 함께 베이징의 공식 명칭이었다. 베이징대학 개교 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라 한 것이 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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