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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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기록에는 집안이 한미해서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생이 두타행(頭陀行)[4]을 닦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김생이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5]의 계율을 지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일찌기 승려로서 출가했던 듯 하다. 김생은 충주의 북진애(北津崖)라는 곳에서 살았으며, 지금 충주에는 김생사터라는 절터도 남아 있다.
다섯 살 때 바람 풍(風)과 달 월(月)이라는 두 글자를 싸리나무로 땅 위에 쓰면서 처음으로 글씨를 익혔고, 6, 7세 때는 불경 두 권을 사경하면서 글씨를 배웠고 평생토록 다른 기능은 배운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시대의 글자 오덕이었던 셈. 그리고 스무 살 때 자신의 글씨체를 완성했는데, 신라에 와있던 일본 승려 혜담(惠曇)에게서 왕희지가 강북(江北)에 있을 때 썼던 친필을 얻은 뒤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는데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표현대로는 예서, 행서와 초서가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썼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김생이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도 글씨체에는 변함이 없었고, 손발이 여자처럼 가늘고 작았다고 한다. 아흔이 넘어서는 오히려 눈빛은 번갯불처럼 빛났다고.
다섯 살 때 바람 풍(風)과 달 월(月)이라는 두 글자를 싸리나무로 땅 위에 쓰면서 처음으로 글씨를 익혔고, 6, 7세 때는 불경 두 권을 사경하면서 글씨를 배웠고 평생토록 다른 기능은 배운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 시대의 글자 오덕이었던 셈. 그리고 스무 살 때 자신의 글씨체를 완성했는데, 신라에 와있던 일본 승려 혜담(惠曇)에게서 왕희지가 강북(江北)에 있을 때 썼던 친필을 얻은 뒤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우는데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표현대로는 예서, 행서와 초서가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썼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김생이 나이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도 글씨체에는 변함이 없었고, 손발이 여자처럼 가늘고 작았다고 한다. 아흔이 넘어서는 오히려 눈빛은 번갯불처럼 빛났다고.
3. 글씨 [편집]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 · 李革, 奉帝勅至館, 書圖蔟.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숭녕(崇寧) 연간에[6] (고려의)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에 가서 변경(汴京)에 묵고 있었는데, 그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고려 사신의) 숙소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서와 초서 글씨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서
“뜻하지 않게 오늘 왕 우군(王右軍)[7]의 친필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하자 홍관이 말하였다.“아니다.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에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삼국사기》 권제48, 열전제8, 김생
김생의 글씨 가운데 친필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중기까지는 김생의 글씨가 고려 땅에 많이 남아있었고 고려의 학자들이 그 글씨를 보배로 여긴다고 했는데, 남긴 건 많았지만 이후 고려와 조선의 전란을 거치며 많이 소실된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김생이 썼다는 전유암산가서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후대에 김생의 글씨를 본떠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에 이화여대 중문과 정재서 교수가 집안 대대로 소장하고 있던 서책 몇 권을 공개했는데,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공동기기원이 지난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서기 720년에서 840년 사이에 만든 것임이 확인되었다. 정재서 교수의 9대조로 영조 때 청도군수를 지냈던 정창유에게 바친 것인데, 당시 김생이 머물렀던 절이 불이 나면서 불복장 유물 속에서 이 글씨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걸 정창유에게 가져다 바쳤고, 그 9대에 걸쳐 보관하고 있었다고.#[8] 현전하는 작품 대부분은 그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비석에 새긴 것이다. 16세기에 제작된 해동명적이라는 금석문 탁본 모음집에 김생이 쓴 '送賀賓客歸越'[9]이라는 글씨가 실려 있고, 이 밖에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문헌에 김생이 썼다고 전하는 사찰 현판에 대한 일화나 금석문 글씨에 대한 호평이 많다.
- 안양사의 편액을 썼는데 몇 년 뒤에 그 편액을 건 건물이 갑자기 남쪽으로 기울어지자 김생을 다시 불러다 북쪽에 글씨를
무게중심이 맞아서쓰게 했더니 건물이 다시 반듯해졌다. - 청룡사[10]의 편액을 썼는데 그 편액 주위에는 항상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김생에게 찾아와서 《제석경(帝釋經)》을 써달라고 청했는데, 김생이 써주고 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은 “나는 제석(帝釋)의 사자다. 나에게 명하여 글씨를 받아오라고 해서 온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나주 객사(客舍)에 있는 ‘유색루(柳色樓)’라는 현판은 김생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현판이었는데, 옛날에는 도깨비들이 그 누각 안에서 소란을 피워서 사람들이 들어가 지낼 수가 없다가 그 편액을 써서 건 뒤로는 도깨비들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김생의 필력(筆力)이 부정한 것을 물리친 것"이라고 했다.
4. 기타 [편집]
2019년 경북 김천의 청암사 도선국사비에서 김생의 친필로 추정되는 발견이 있었다. 다만 금석문에 새긴 글자 위에 창주도선국사라는 글자를 새겨버린데다가 풍화가 심해서 해독된 글자가 별로 없다는 듯.#
[1] ~~생(生)이라고 불리는 경우 대개 이름을 빼고 성씨만 붙여서 부른다. 김생이라는 말은 풀이하면 '김씨'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본명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성이 김씨였던 것은 분명하다.[2]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연대로 당예종 경운(景雲) 2년, 신라 성덕왕(聖德王) 10년이다.[3] 당헌종 원화(元和) 2년, 신라 애장왕 10년이다.[4] 불교에서 승려들이 걸식하면서 수행하는 것. 일종의 탁발.[5] 고기와 파ㆍ마늘 따위를 먹지 않는 것.[6] 북송 휘종의 연호로 서기로는 1102년에서 1106년 사이.[7] 왕희지의 관직이 우군대장군이었기 때문에 으레 왕 우군으로 불린다.[8] 조선 시대까지 드문드문 김생의 친필로 전하는 글씨를 내가 봤다고 적은 문헌들이 종종 보인다.[9]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강남으로 돌아가는 하지장(賀知章)을 위해 지어 주었다는 칠언시.[10] 안동 청량산에 아직도 있는 절. 경내에는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전하는 난가대라는 곳도 있다.[11] 원래는 경복궁 안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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