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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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용도4. 역사5. 여담

1. 개요 [편집]

慶熙宮 光明殿

경희궁에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 이름 [편집]

'광명(光明)' 뜻은 '밝은(明) 빛(光)' 또는 '밝게(明) 빛난다(光)'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로 덕수궁 함녕전정문 광명문(光明門)이 있다.

3. 용도 [편집]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주로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열었던 격 높은 건물이었던 듯 하다. 1782년(정조 6년) 6월 13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대내(大內)의 크게 이름난 전각'이라 했으며 1783년(정조 7년) 1월 12일 자 기사에는 내정전(內正殿), 즉 내전에서 가장 으뜸가는 전각이라 했다. 6개월 뒤 기사에서는 조하를 받는 대내의 정전으로 인정전[1], 명정전[2]과 비슷하며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조의 작품들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에 수록된 〈경희궁지〉에는 내전에서 하연을 받는 곳으로 적혀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곳을 빈전과 동뢰연[3] 및 기타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는 기사가 있다. 빈전으로 쓴 때는 인목왕후# 선의왕후의 국상 때였고#, 동뢰연 장소로 활용한 때는 숙종 - 인원왕후, 경종 - 선의왕후#, 문조(효명세자) - 신정왕후#, 헌종 - 효정왕후# 가례 때였다.

이밖에도 현종대왕대비였던 인조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추가해 올리는 의식을 여기서 열었고#, 영조 때는 영희전에 있던 세조 어진#, 헌종 때는 준원전[4]에 있던 태조 어진을 광명전으로 옮겨와 베껴 그렸다.# 《궁궐지》 - 〈광명전조 - 광명전기〉에는 숙종과 영조가 이곳에서 크고 작은 연회를 여러 번 열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836년(헌종 2년)에 종묘를 넓혀지을 때에는 역대 임금왕비신주를 이 곳과 장락전에 나누어 모셨다.#

4. 역사 [편집]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5] 지었다. 이후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했다.

1727년(영조 3년) 3월에[6] 부속 건물 첨선당에서 불이 났으나# 광명전은 무사했다. 그러나 정조 초반에 건물이 무너져 고쳐지었다.#

고종 재위 초반인 1860년대 후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다만, 1868년(고종 5년)에 광명전 동쪽 담장이 무너져 수축할 것을 경희궁 입직 위장 박진예가 아뢴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저 때 까지는 남아있었던 듯 하다.

5. 여담 [편집]

  •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광명전에 있었을 때, 작은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에 또아리를 친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궁인들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명성왕후는 "이곳은 산이랑 가까우니 뱀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해칠 필요 없다."며 궁인들을 안심시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지 말라했다.#

[1] 창덕궁정전.[2] 창경궁의 정전.[3] 同牢宴. 가례 때 신랑신부가 교배례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4] 濬源殿. 함경남도 영흥군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5]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6] 음력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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