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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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남도 고흥군 [편집]
대한민국의 지명. 고흥군 문서 참조.
2. 백제 시대 역사적 인물 [편집]
高興
(생몰년도 미상)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 관료. 알려진 관직은 박사(博士).
375년 백제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이 기록을 제외한 고흥의 행적은 지극히 짧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백제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서기의 편찬은 고대 국가의 완성 및 백제 국력과 왕권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기는 후대의 기록인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백제삼서 중 백제기의 원형을 제시한 역사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2]
고흥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출신에 대해서는 한사군계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이는 낙랑 유적에서 발굴된 전돌 등의 유물에 고씨, 왕씨, 장씨 등의 성씨가 보이기 때문인데 한사군 몰락 전후로 상당수 인재들이 백제 등지로 망명해서 백제 문한기구에 인재들로 기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근초고왕 시기 이들은 교육보다는 왕의 정치 자문단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생몰년도 미상)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 관료. 알려진 관직은 박사(博士).
375년 백제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이 기록을 제외한 고흥의 행적은 지극히 짧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백제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서기의 편찬은 고대 국가의 완성 및 백제 국력과 왕권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기는 후대의 기록인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백제삼서 중 백제기의 원형을 제시한 역사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2]
고흥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출신에 대해서는 한사군계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이는 낙랑 유적에서 발굴된 전돌 등의 유물에 고씨, 왕씨, 장씨 등의 성씨가 보이기 때문인데 한사군 몰락 전후로 상당수 인재들이 백제 등지로 망명해서 백제 문한기구에 인재들로 기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근초고왕 시기 이들은 교육보다는 왕의 정치 자문단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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