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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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시작 [편집]
3. 위기와 폐간 [편집]
1900년 8월 8일자 간행본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밀약[1]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를 고깝게 여긴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핵심 인물인 남궁억이 투옥되고 사장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 이후로 어찌저찌 운영을 이어갔지만 1905년 을사 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계기로 인해 정간당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문 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고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황성 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 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
당시의 황성 신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황성 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 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
당시의 황성 신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 옛 한글 텍스트 형태 : 한국 언론 진흥 재단의 고신문 디렉토리 서비스
- 이미지 형태 : 한국 독립 운동사 정보 시스템의 원문 정보
- 텍스트 & 이미지 형태 : 국립 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의 황성신문
4. 기타 사항 [편집]
[1] 러시아와 일본이 나중에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통치하자는 밀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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