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한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홍인한 洪麟漢 | |
본관 | |
출생 | |
사망 | |
자 | 정여(定汝) |
가족관계 | |
붕당 | 북당, 탕평당 |
최종 관직 |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722년 홍현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풍천 임씨였으나 생모는 성주 이씨였다.
첫 관직인 통덕량은 음서를 통해 합격했으나 재직 중인 175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풍산 홍씨라는 명문가 출신에다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인척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무기삼아 승승장구하여 급제한 53년에 가주서와 정언, 54년에 교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2]
첫 관직인 통덕량은 음서를 통해 합격했으나 재직 중인 175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풍산 홍씨라는 명문가 출신에다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인척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무기삼아 승승장구하여 급제한 53년에 가주서와 정언, 54년에 교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2]
홍인한이 감사(監司)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石邃)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쓸데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무시하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실록의 기록이다.
2.1. 정후겸과의 연합, 권력을 잡다 [편집]
홍봉한은 정순왕후 김씨의 가문인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힘이 커지자, 동맹을 제안하려했으나 파직되었다. 그리고, 김귀주 등 청명당의 공격은 더욱 강해지며 은언군과 은신군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삭출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당색으로 인사를 행했단 이유로 김종수, 김치인 등이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홍봉한이 승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귀주의 김씨 가문 위주의 청명당과 홍봉한의 일부 탕평당은 약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손인 정조가 홍봉한을 비롯한 외가인 풍산 홍씨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눈치와 수완이 좋았던 홍인한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자이자 떠오르는 실세인 정후겸에게 접근한다. 신예였던 정후겸 역시 홍인한의 정보력, 인맥 등이 필요했기에 둘의 동맹관계는 수립된다.
이렇게 이복형 홍봉한을 대신해 정후겸과 연합해 조정의 권력을 잡았으나 딱히 홍봉한을 배신하진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홍인한이 홍봉한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고 해석이 되지만, 딱히 형제간의 의견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 오히려 공공의 적이였던 김귀주, 김관주의 경주 김씨가 몰락했다. 다만 홍봉한은 이때 실각하면서 조정 내에서의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영조 시대 마지막 3년은 사실상 홍인한과 정후겸 두 사람이 주물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가 너무 늙어서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할 때 세손을 감시하고 가짜뉴스와 익명서까지 넣으며 방해했다. 홍인한은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리자 극구 반대하며 나섰고 영조가 전교를 쓰라는 명령을 내리자 승지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듣지 못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처절하리만치 정조의 승계를 방해했다. 심지어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에 준하는 명을 사양하겠다는 소를 올리며 도움 요청 및 부탁을 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심상운이라는 자신의 파 인물에게 상소까지 올리며 저지하려 했지만 막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수순대로 즉위했다. 그토록 방해했던 정조의 즉위 이후 홍인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귀주의 김씨 가문 위주의 청명당과 홍봉한의 일부 탕평당은 약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손인 정조가 홍봉한을 비롯한 외가인 풍산 홍씨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눈치와 수완이 좋았던 홍인한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자이자 떠오르는 실세인 정후겸에게 접근한다. 신예였던 정후겸 역시 홍인한의 정보력, 인맥 등이 필요했기에 둘의 동맹관계는 수립된다.
이렇게 이복형 홍봉한을 대신해 정후겸과 연합해 조정의 권력을 잡았으나 딱히 홍봉한을 배신하진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홍인한이 홍봉한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고 해석이 되지만, 딱히 형제간의 의견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 오히려 공공의 적이였던 김귀주, 김관주의 경주 김씨가 몰락했다. 다만 홍봉한은 이때 실각하면서 조정 내에서의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영조 시대 마지막 3년은 사실상 홍인한과 정후겸 두 사람이 주물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가 너무 늙어서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할 때 세손을 감시하고 가짜뉴스와 익명서까지 넣으며 방해했다. 홍인한은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리자 극구 반대하며 나섰고 영조가 전교를 쓰라는 명령을 내리자 승지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듣지 못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처절하리만치 정조의 승계를 방해했다. 심지어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에 준하는 명을 사양하겠다는 소를 올리며 도움 요청 및 부탁을 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심상운이라는 자신의 파 인물에게 상소까지 올리며 저지하려 했지만 막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수순대로 즉위했다. 그토록 방해했던 정조의 즉위 이후 홍인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2.2. 몰락 [편집]
3. 사후 [편집]
4. 가족관계 [편집]
- 조부 : 홍중기(洪重箕)
- 8촌형 홍창한
- 9촌조카 홍낙춘
- 10촌 종손 홍국영
[1] 완도군은 1896년 [2] 조영순(趙榮順)이란 자를 변호하려다 물러났다 한다.[3] 홍봉한 역시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홍인한을 살리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4] 그 뜻은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한지 3개월이 되자 않아 제거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영조의 나이가 당시 조선 왕 중에서, 그리고 후에 즉위하는 왕들을 합쳐도 최장수+최장기 집권이여서 언제 죽을 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후계자인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큰 죄가 아닐 수 없다.[5]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6]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2.[7] 이때는 의외로 안동 김씨를 비롯한 신하의 반대가 거의 없었다.[8] 임방의 딸[9] 이세황의 딸[10] 신방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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