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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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525년(중종 20) 판결사 홍서주[4]의 아들 홍여와 가례를 올렸는데, 남편인 홍여는 당성위에 봉해졌다.
중종은 혜정옹주가 출합할 때를 고려하여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 이에 중종은 "지금 혜정 옹주의 집은 단지 70간으로 비록 제도보다 지나친 듯하나 반드시 용도를 헤아려 지었을 것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5]나중에 효종이랑 현종이 공주 집 지어주는거 보면 70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1527년(중종22) 작서의 변이 일어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를 갔고[6], 옹주의 남편 홍여는 경빈 박씨의 사주로 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1533년(중종 28)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의심 받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홍여는 소년이었는데,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7]
나중에야 일의 진상이 밝혀지고,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안로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간다.
중종은 혜정옹주가 출합할 때를 고려하여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 이에 중종은 "지금 혜정 옹주의 집은 단지 70간으로 비록 제도보다 지나친 듯하나 반드시 용도를 헤아려 지었을 것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5]
1527년(중종22) 작서의 변이 일어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를 갔고[6], 옹주의 남편 홍여는 경빈 박씨의 사주로 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1533년(중종 28)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의심 받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홍여는 소년이었는데,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7]
나중에야 일의 진상이 밝혀지고,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안로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간다.
그 옥사를 추국할 적에 김안로가 추관(推官)이었는데, 홍여의 집안으로 죄를 돌리고자 하여 이는 작서(灼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그 집의 노비(奴婢)들이 무수하게 형장을 받고 그가 묻는 대로 자복(自服)하였다.《조선왕조실록》 중종 32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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