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환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허승환(許承煥)
본명
허승완(許承完)
이명
허항, 허철
생몰
사망지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허승환은 1893년 9월 27일 경상남도 통영군 한북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허팽장(許膨章)은 절충장군이었고, 부친 허근은 통영의 지주였다. 유족의 회고에 따르면, 허승환은 힘이 무척 세서 씨름판에 자주 나가 황소를 우승 상품으로 타와서 동네 잔치를 열기도 했고, 택견으로 체력을 단련했다고 한다. 1918년 12월 만주로 망명한 그는 러시아 적군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4월 중국 연길현에서 설립된 의군부 산하에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허승환은 의군부에서 이범윤 총사령의 지휘하에 군법원장을 역임했으며, 조선의용군의 규모를 대폭 늘려 1년 2개월 만에 6개 대대를 편성했다. 그는 허룽, 왕칭, 혼춘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로부터 의연금을 받아 운영자금으로 충당했다. 또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며, 1920년 1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후퇴하는 독립군과 함께 하다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될 때 중대장을 맡았다.

1921년 7월 러시아 수이푼에서 최태순, 장승옥, 임명선 등과 함께 한족공산당에 합류한 그는 제1기 대대장, 제2기 독립대장을 역임했다. 1922년 10월 러시아 군대에 의해 독립군 부대가 무장해제 당한 후, 그는 흩어진 독립군 부대원을 규합하여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특립대장(特立隊長)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자금부족으로 식량난까지 겪어 부득이 해산했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50원을 지원받은 뒤 이범석, 김규식, 고평 등과 함께 400명 규모로 고려혁명군을 재조직하고 헌병대장을 맡았다.

1923년 4월, 허승환은 블라디보스토크 송전관에 조직된 고려혁명당 결사대장을 맡았고 일본 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암살대를 조직했다. 그해 12월 하순엔 중국 지린성 돈화현 황토요자에서 개최된 대표회의에 의열단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고려혁명군, 적기단 등과 협의해 일제에 대한 연합투쟁을 결의했다. 또한 1924년 11월 왕청현 나자구에서 설립된 대한신정부 혁명군의 임시 제2중대장을 맡았다.

일제 간도총영사관 기밀문서 14호에 따르면, 허승환은 1925년 31세의 나이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동령현 만보구 산림 속에 대한군정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고 교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 4월에는 의군부와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가 합세하면서 신민부가 창설될 때 대한독립군 참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연해주로 이동한 그는 1929년 9월 25일 '백의동포 이상촌' 건설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을 단행하던 시기인 1937년 6월 17일 반혁명 간첩조직인 이루크잔 회원이 되어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우수리스크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38년 6월 2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후 1957년 11월 19일 태평양 함대 군사법원의 결정으로 복권 처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허승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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