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구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허상구(許相球)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허상구는 1898년 10월 3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수묵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작인을 부릴만큼 유복했고, 그는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학업에 정진하다 1919년 무렵에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관하기 위해 육창문(陸昌文)·육창주(陸昌柱)와 함께 서울에 올라간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원산 기타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세 사람은 고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허상구는 서울에서 열흘 동안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 귀가해서는 부친 허훈(許訓), 형 허상기, 김용이(金龍伊)와 함께 다시 구체적으로 독립운동 거사를 상의하고 이원 장날인 3월 27일을 독립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7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동서 양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시위군중 300여명을 이끌고 주재소에 쇄도하여 헌병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을 부수고 연행자를 탈출시키며 계속 격렬하게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처분해야 했던 그는 말년을 곤궁하게 지내다 1958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허상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허상구는 서울에서 열흘 동안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 귀가해서는 부친 허훈(許訓), 형 허상기, 김용이(金龍伊)와 함께 다시 구체적으로 독립운동 거사를 상의하고 이원 장날인 3월 27일을 독립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7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동서 양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시위군중 300여명을 이끌고 주재소에 쇄도하여 헌병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을 부수고 연행자를 탈출시키며 계속 격렬하게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처분해야 했던 그는 말년을 곤궁하게 지내다 1958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허상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