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행궁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상세 [편집]
2.1. 기록상의 모습 [편집]
최초로 나오는 기록상의 모습은 이렇다.
태조실록 1권, 총서 71번째기사. 태조가 자유 자재로 활을 쏘다신우(辛禑) 11년(1385) 을축, 태조가 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新矢]을 바치니, 태조가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稻]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쏠 적에, 짐승의 왼쪽에 있으면 짐승의 >오른쪽을 쏘아서, 짐승이 오른쪽으로부터 가로질러 달아나>서 왼쪽으로 나오면, 짐승의 왼쪽을 쏘는데, 태조는 짐승을 쫓아서 짐승이 비록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나오더라도 즉시 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의 말을 돌려 꺾어서 채찍질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왼쪽에서 바로 달아나게 하고서, 그제야 이를 쏘는데 또한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히니,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온갖 짐승을 쏘되, 반드시 쏠 때마다 그 오른쪽을 맞힌다."
하였다. 우왕이 일찍이 해주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이두란(李豆蘭)이 태조에게 말하였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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