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삼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한흥삼(韓興三) |
이명 | 배량(裵粱) |
본관 | |
생몰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한흥삼은 전라도 태인현 옹지면 제내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일리마을)에서 태어났다.
20살 때인 1894년 1월,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전주를 거쳐 삼례까지 진출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패하자, 귀향하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음력 4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정읍, 순창 등에서 활약한 바 있다.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의 해산 후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임실군 출신의 의병장 정성현(鄭成玄)이 부하 30여명과 함께 총 20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항일활동을 한다는 사정을 전해 듣고 가산을 팔아 총기, 병기 등을 다수 구입하여 1909년 음력 2월 10일, 정성현 의진에 가담하였다.
이 부대에서 양운경(梁雲京)·김윤오(金允五)·김낙필·김기만·이홍길(李弘吉)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의 각 촌리를 전전하며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투를 계속 수행하면서 김제군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던 중, 1909년 8월 중순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7월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 직후인 7월 11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살 때인 1894년 1월,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전주를 거쳐 삼례까지 진출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패하자, 귀향하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6년 음력 4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정읍, 순창 등에서 활약한 바 있다. 최익현, 임병찬 의병부대의 해산 후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임실군 출신의 의병장 정성현(鄭成玄)이 부하 30여명과 함께 총 20정, 칼 1자루를 휴대하고 항일활동을 한다는 사정을 전해 듣고 가산을 팔아 총기, 병기 등을 다수 구입하여 1909년 음력 2월 10일, 정성현 의진에 가담하였다.
이 부대에서 양운경(梁雲京)·김윤오(金允五)·김낙필·김기만·이홍길(李弘吉)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의 각 촌리를 전전하며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투를 계속 수행하면서 김제군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던 중, 1909년 8월 중순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7월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 직후인 7월 11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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