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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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기뉴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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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주앙 코엘류 네투 (João Coelho Netto) |
생년월일 | |
사망년월일 | |
국적 | |
출신지 |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6cm / 63kg |
등번호 | -[1] |
소속팀 | 플루미넨시 FC (1925-1939) |
국가대표 | 2경기 / 3골 (1930) |
1. 생애 [편집]
1.1. 클럽 [편집]
주앙 코엘류 네투. 흔히 줄여서 프레기뉴(Preguinho)라는 별명으로 불린다.[2]
그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인 코엘류 네투였고 상당히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이미 11살 때부터 플루미넨시의 유소년 팀에 소속되어 축구를 접하였다.
데뷔는 20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이루었다. 4월 19일 이날 오후 프레기뉴는 주 수영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메달을 목에 건 채 택시를 타고 라랑제이라스 구장으로 가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합에서 플루미넨시는 방구와 1대1로 비겼다.
하지만 방구 역시 프레기뉴에게 계약 제시의 의미로 형 마누의 사진을 준 적이 있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3] 하지만 결국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와 최종 계약하였고 방구를 상대로 커리어에서 총 17골을 기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인 코엘류 네투였고 상당히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이미 11살 때부터 플루미넨시의 유소년 팀에 소속되어 축구를 접하였다.
데뷔는 20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이루었다. 4월 19일 이날 오후 프레기뉴는 주 수영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메달을 목에 건 채 택시를 타고 라랑제이라스 구장으로 가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합에서 플루미넨시는 방구와 1대1로 비겼다.
하지만 방구 역시 프레기뉴에게 계약 제시의 의미로 형 마누의 사진을 준 적이 있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3] 하지만 결국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와 최종 계약하였고 방구를 상대로 커리어에서 총 17골을 기록하였다.
1.2. 국가대표 [편집]
1.3. 이후 [편집]
프레기뉴는 선수 은퇴 이후에도 플루미넨시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플루미넨시의 축구팀 임원으로서, 그리고 고문으로서 오래 활동하였고 꽤 중요한 인물로 대접을 받았다. 그는 1979년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2. 만능 스포츠맨 [편집]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편집]
활약 당시에는 만능 스포츠맨이자 브라질의 아이돌이었고 현재에도 브라질 대표팀의 기록 초반부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나는 100권 이상의 책을 썼지만 거리에서는 프레기뉴의 아버지로 더 많이 불린다.코엘류 네투(프레기뉴의 아버지)
4. 뒷이야기 [편집]
- 프레기뉴가 수영을 잘하게 된 이유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프레기뉴는 왕따를 당했었다. 8살 무렵의 프레기뉴를 물에 끌고가 빠뜨린 적이 있었는데 허우적대는 모습이 못(포르투갈어로 prego)과 비슷해서 프레기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이후에는 수영 연습을 열심히 해서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다.
- 브라질 축구계도 프로화가 되었지만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로부터 돈을 받기를 거부하고 은퇴할 때까지 무상으로 뛰었다.
5. 어록 [편집]
뭐라 말을 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플루미넨시는 이미 나의 영혼이고 심장이자 몸입니다.[6]
6. 수상[7] [편집]
6.1. 클럽 [편집]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3회: 1936, 1937, 1938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 4회: 1925, 1927, 1933, 1935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시조 대회 우승 2회: 1925, 1927
6.2. 개인 [편집]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2회: 1930, 1932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또는 프레구(Preg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3] 형 마누는 프레기뉴와 사이가 매우 좋은 형이었고, 각종 운동을 함께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22년. 시합 중에 복부를 가격 당했고 내부 장기 출혈로 인해 사망하였다[4]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 중 가장 앞순위에 꼽히는 인물이다. 1930년 월드컵 이전에는 주장이 누구인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5] 농구에서도 통산 711점을 올려 클럽 내 최다 득점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6] 1952년 1월 22일, 플루미넨시로부터 최고의 공훈 선수로 선정된 자리에서의 소감.[7]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 원 클럽 맨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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