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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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1.1. 신라 [편집]
1.2. 고려 [편집]
팔관회에는 예법에 따라 화려하게 장신한 의식용 기물인 깃발, 악기, 부채, 지팡이, 우산을 들고 임금이 탄 초오련을 호위하는데 행렬대의 팔관의위는 3726명, 팔관 노부는 548명이 참여했을 만큼 대규모이다.『고려사』 권72 ‘팔관노부(八關鹵簿)
고려가 팔관회(八關會)를 개설(開設)하였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래로부터 여러 대를 지나 궁예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중동(仲冬)에 팔관회를 크게 개설하여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가 그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궁궐 뜰에 윤등(輪燈) 한 곳을 설치하고, 그 곁에 향등(香燈)을 벌여 놓고서, 온땅에 가득히 광명으로 밤을 새웠다. 또 신라의 화랑을 본떠서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 뜰에서 줄지어 춤추게 하였다. 또 두 개의 채붕(綵棚 화려하게 꾸민 가설무대)을 마련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 남짓 되는데 모양이 연대(蓮臺)와 같아, 바라보면 덩그렇고 아득하였다. 그 앞에서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였는데, 그 중 사선악부(四仙樂府)의 용ㆍ봉황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모두 포홀(袍笏 도포와 홀. 즉 조복차림)로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이 온 도성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왕은 의봉루(儀鳳樓)에 거둥하여 관람하였으며,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여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상례(常例)를 삼았다.『동사강목』 제5하 918년
고려는 918년 궁예를 축출한 직후부터 팔관회를 개최했다. 동사강목에서는 이 918년의 팔관회에서 옛 화랑을 본따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아름다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았는데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고 쓰고 있다. 이런 기록을 보아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팔관회를 세세한 부분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개최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 고려 팔관회의 불교적 색채는 다소 옅어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이 훈요 10조에서 '천령(天靈) 및 오악(五惡)·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기존의 불교적 성격에 토속신에 대한 제례적 성격도 띄게 되었음을 알수있다. 또한 송(宋)나라 상인이나 여진(女眞) 및 탐라(耽羅)의 사절이 축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다는 점에서도 과거와 차이가 있다.#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를 통해 팔관회와 연등회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후세에 당부했다.
그런데 유교 우선적 정책을 펼친 성종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지랄이다(...)."라며 훈요 10조를 무시하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를 폐지(987년)해버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이후 다다음 왕인 현종 때에 정당문학 최항의 건의로 다시 부활(1010년)하였다[3].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행해졌다.
팔관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1170년 의종 24년의 팔관회에서 무신정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했던 곳 역시 팔관회 장소였다.[4]
1.3. 조선 [편집]
1.4. 현대 [편집]
2. 창작물에서 [편집]
3. 같이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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