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상세 [편집]
탄허는 1913년 음력 1월 15일, 전라북도 만경군 군내면(현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의 유학자 집안에서 독립운동가인 율재(栗齋) 김홍규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홍규는 보천교 고위 간부로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그는 6세에서 21세까지 사서(四書) 삼경(三經) 및 노장(老莊) 등 제자(諸子)의 전 과정을 마쳤다.
1934년 출가 전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한학, 기호학파 유학 등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이후 22살 되던 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하였고, 이후 월정사에 적을 두다 1964년부터 7년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맡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는 물론 다양한 한학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완역하지 못한 팔만대장경의 현대역 작업에 몰두한 끝에 한글대장경을 간행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학문을 본받기 위해 양주동 박사[1]가 직접 절로 찾아가 그에게 장자 강의를 들으러 갔던 적이 있다.
이러한 학문 도량과 더불어 탄허가 유명한 것은 그의 놀라운 예지력이다.
1934년 출가 전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한학, 기호학파 유학 등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이후 22살 되던 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하였고, 이후 월정사에 적을 두다 1964년부터 7년간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을 맡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는 물론 다양한 한학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완역하지 못한 팔만대장경의 현대역 작업에 몰두한 끝에 한글대장경을 간행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학문을 본받기 위해 양주동 박사[1]가 직접 절로 찾아가 그에게 장자 강의를 들으러 갔던 적이 있다.
이러한 학문 도량과 더불어 탄허가 유명한 것은 그의 놀라운 예지력이다.
3. 예언 [편집]
4. 기타 [편집]
- 대한불교조계종 36대 총무원장을 지낸 승려 원행이 쓴 논픽션 <탄허 대선사 시봉 이야기>나 <10.27 법난>에 따르면 정승화 참모총장이 불교 신자였던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무르고 있던 탄허를 종종 찾아뵙고는 했는데, 탄허는 평소 정 총장이 자신을 찾아올 때면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니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와 그렇게 약속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9년 10.26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탄허는 제자인 원행을 시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 좀 걸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원행을 직접 서울로 보내 정 참모총장을 만나서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던지 전화를 한 통만 해 달라"고 전하고 오게 했고, 원행은 참모총장 공관 앞에서 군인들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으므로 끝내 정 총장은 탄허를 만날 수 없었다. 두 달 뒤에 12.12 사태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군법사 한 명을 월정사로 보내 "감옥에서 공부하고 싶으니 탄허가 강의한 화엄경을 보내 달라"고 탄허에게 부탁했지만, 탄허는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가서 그 사람더러 '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내가 묻더라고 전하라. 그는 이미 실기(失機)[2]했다."고 거절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0년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정승화 전 총장은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라이선스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은 문서는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문서의 기여자는 역사 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두어의 N: - 나무위키 사용자, R: - 리그베다 위키의 사용자를 뜻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무위키에서 동일한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