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1907)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907년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중학교와 치바고등원예학교(現 치바대학 원예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나주금천중학교 교장, 호남원예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속하면서 나주군 지부장, 전라남도지부 선전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전라남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나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종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독재화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 몸담았다가 탈퇴하였고, 1955년 도진희, 박종길 등과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상공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사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해당 선거에서 부정선거(쌍가락지 표 조작)로 1959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로 전라남도 나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 정명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호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속하면서 나주군 지부장, 전라남도지부 선전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전라남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나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종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사사오입 개헌 등 이승만의 독재화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 몸담았다가 탈퇴하였고, 1955년 도진희, 박종길 등과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상공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사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해당 선거에서 부정선거(쌍가락지 표 조작)로 1959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로 전라남도 나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 정명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호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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