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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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문하시중 고려국 청하군 후작 최사위 | |
시호 | 정숙공(貞肅公) |
작위 | 청하현 개국남(淸河縣 開國男) 청하현 개국백(淸河縣 開國伯) 청하군 개국후(淸河郡 開國侯) / 한남군 개국후(漢南郡 開國侯) |
본관 | 수원 최씨 |
이름 | 사위(思威) |
자 | 동환(動寰) |
출생지 | 한남도(漢南道) 광주목(廣州牧) 수주(水州) |
묘지 | 불일사(佛日寺) 법운산(法雲山) 근처 → 송림현(松林縣) 송현(松峴) |
생몰연도 | 961 ~ 1041.03.04 |
1. 개요 [편집]
2. 상세 [편집]
목종 대에 형부상서[2]를 지냈다. 이것이 최사위의 최초 기록인데 이를 보아 능력이 뛰어났고 배경인 가문의 세력이나 뒷배경도 꽤 탄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행영 군단 | |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 |
참지정사(參知政事) 강조 | |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 |
중대부사(中臺副使) 이현운 |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 |
판관(判官) | |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 | 시어사(侍御史) 윤징고 |
시어사(侍御史) 도관 | 원외랑(員外郞) 노전 |
수제관(修製官) | |
우습유(右拾遺) 승이인 |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 |
통군사(統軍事) | |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 | |
휘하 장병 | |
300,000 명 | |
요성종이 의군천병 40만을 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 강조(고려)가 이끈 30만 행영 군단의 지휘관 중 한명이었다. 통군사 직을 받아 통주로 출전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후 계속 북방에서 거란과 싸웠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정치적인 능력이나 서무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 외에는 별로였던듯 하다.
잦은 패전의 책임자였지만, 서무 능력을 인정받어 계속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가 되었다가 이부상서(吏部尙書)[3]를 겸했다. 현화사비에도 등장하는데 현화사 건설을 위해 별감사(別監使) 직위를 받아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를 건축했다. 현화사비에 적힌 직위는:
잦은 패전의 책임자였지만, 서무 능력을 인정받어 계속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가 되었다가 이부상서(吏部尙書)[3]를 겸했다. 현화사비에도 등장하는데 현화사 건설을 위해 별감사(別監使) 직위를 받아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를 건축했다. 현화사비에 적힌 직위는:
-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4]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5]
- 검교태부(檢校太傅)[6]
-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7]
- 판삼사사(判三司事)
- 상주국(上柱國)[8]
- 청하군 개국후(淸河郡 開國侯)[9]
- 식읍 1,000호(食邑 一千戶)
이후 성종의 12목 제도를 더 발전시켜서 지방관과 파견직을 더욱 세밀화하고 심화시켜 고려의 지방 통치를 강화시켰다. 또한 지방 소규모 호족들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이 지방 통치력 강화의 성과를 인정 받아:
이 되었다. 흥료국의 건국을 틈타 거란을 침공하고자 했던 참지정사 곽원의 제안을 반대했다. 후 나이가 들어 퇴직을 요청하였고, 내사령(內史令) 명예직을 받고 퇴직하였다. 정종 대에 사망하였고,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전쟁에서는 큰 역할을 맏지 못했지만 지방 제도의 개혁으로 고려 행정 제도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 공으로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쟁에서는 큰 역할을 맏지 못했지만 지방 제도의 개혁으로 고려 행정 제도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 공으로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묘지명 기록 [편집]
3.1. 본인 묘지명 [편집]
문종 때 최사위의 막내아들 최영언이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묘지명이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다. 고려사엔 없는 최사위의 가계가 기록되있고 여섯 아들의 이름과 관직을 알수 있다. 각각:
- 1남 어사중승(御史中丞) 최충공(崔忠恭)
- 2남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충경(崔忠敬)
- 3남 사재승(司宰丞) 최준검(崔遵儉)
- 4남 내사서령(内史書令) 최충약(崔忠諾)
- 5남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郎中) 최충영(崔忠永)
- 6남 시합문지후(試閤門祇侯) 최영언(崔令言)
최사위는 건축 및 토목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그가 참여한 건축물은:
- 봉은사(奉恩寺)
- 태묘(太廟)
- 보제사(普濟寺) 금당(金堂), 나한전(羅漢殿)
- 의왕사(醫王寺)
- 사가원(寺家院)
- 서경(西京) 사천삼사(四天三寺)
- 서경(西京) 장락궁(長樂宮)
- 서경(西京) 태조진전(太祖眞殿)
- 연주(延州) 진북영화사(鎭北靈化寺)
- 선주(宣州) 신중사(神衆寺)
- 진도현(珍㠀縣) ?찰원(?察院)
- 시진현(市津縣) 포천(布川) 미륵원(彌勒院)
- 낭천군(狼川郡) 개통사(開通寺)
- 계성사(啓星寺)
- 개차근산(皆次斤山) 정양사(正陽寺)
- 수주(水州) 자복사(資福寺)
- 송림현(松林縣) 보현관(普賢舘)
가 있다. 보면 보제사, 봉은사, 현화사, 태묘, 장락궁, 태조진전 등 유명한 건물도 눈에 띈다.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다음과 같다: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다음과 같다:
- 직위: 태사(太師) - 내사령(內史令)
-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시호: 정숙공(貞肅公)
직위와 시호는 고려사와 똑같지만 향직 품계가 추가되어 있다.
최사위의 현종 옹립 시기의 일화, 여요전쟁 때의 일화가 실려있다. 방금성고(方今聖考)[15]께서 잠룡(潜龍)[16] 시절 대량원(大良院)[17]에 머물고 있을 때, 여후(呂后)[18]가 김치양과 성고를 죽이려하자 이를 막고 대보(大寶)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여요전쟁 시기, 거란국(契丹國)이 병마를 끌고와 배주신좌(背主臣佐)[19]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사위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일축했다. 거란군이 돌아가던 중, 그들을 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최사위의 현종 옹립 시기의 일화, 여요전쟁 때의 일화가 실려있다. 방금성고(方今聖考)[15]께서 잠룡(潜龍)[16] 시절 대량원(大良院)[17]에 머물고 있을 때, 여후(呂后)[18]가 김치양과 성고를 죽이려하자 이를 막고 대보(大寶)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여요전쟁 시기, 거란국(契丹國)이 병마를 끌고와 배주신좌(背主臣佐)[19]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사위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일축했다. 거란군이 돌아가던 중, 그들을 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3.2. 증손자 묘지명 [편집]
최사위의 증손자 최계방(崔繼芳)은 자가 복시(復時)이다. 아들은 장남 최함소(崔諴少), 차남 최관오(崔觀奧), 성명 미상의 딸이 하나있다. 최계방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공신호: 추충동덕진랑위주광국공신(推忠同德盡郎衛主匡國功臣)[20]
- 직위: 내사령(內史令)
- 수직: 수태사(守太師)
- 작위: 한남군 개국후(漢南郡 開國侯)
- 시호: 정숙공(貞肅公)
3.3. 고손자 묘지명 [편집]
[1] 김해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해부 아간(金海府 阿干) 유율행(庾欝行)이다.[2] 형부상서는 '형부상서판사'의 줄임말로 형부의 장관이다. 형부는 지금의 법무부이다. 즉 형부상서는 지금의 법무부장관.[3] 이부의 장관.[4] 현종이 봉한 동덕공신호.[5] 문산계 품계로 종 1품 최고위 품계.[6] 검교직은 실권이 없고 단순히 직위에 이름만 올렸을 때 붙힌다. 태부는 삼사직 중 서열 2위이다.[7] 중서문하성의 차관.[8] 최고위 훈위. 훈위는 신하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주는 명예직이다.[9] 청하군을 분봉받은 후작.[10] 현종이 동덕공신에서 새로 봉한 공신호.[11] 삼사 중 서열 1위로 최고위 칭호.[12] 중서문하성의 최고위 관직.[13] 고려사 기록인데 이미 현화사비엔 후작위를 받은 것이 보이기에 고려사에 착오가 있는 듯 하다.[14] 현화사비와 교차검증이 가능하다.[15] 방금은 지금이란 뜻이다. 성고는 임금의 아버지를 의미하는데, 이 묘지명이 만들어졌을 때가 문종 때다. 문종의 아버지는 현종임으로 '지금 임금의 아버지'는 현종이다.[16] 후계자를 의미하는 단어.[17] 현종은 대량원군 군호를 받아 대량원에 봉해졌다.[18] 천추태후를 한나라의 여후로 비유하여 비난한 것이다.[19] 주인을 배신한 신하, 즉 강조를 의미한다.[20] 현종이 하사한 공신호로 고려사에 나오는 광국공신호의 풀버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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