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균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최도균(崔道均)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편집]
최도균은 1926년 12월 31일 평안북도 영변군 독산면 화죽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1942년 10월, 그는 동료 유학생 손명조(孫命祚)[1]와 의기투합한 뒤 민족의식을 길러오다가 이원희·박오훈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1943년 4월에 도쿄 소재한 자신의 하숙집에서 항일결사 「나라당」을 결성했다. 이때 그는 나라당의 내무의 일을 맡았다.
이후 이들은 동지포섭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교포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항일활동을 폈다. 그러나 나라당 활동은 곧 일제 헌병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1943년 7월 체포되었다. 그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3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교육 활동을 하다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하여 고창 중,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15년 6월 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들은 동지포섭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교포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항일활동을 폈다. 그러나 나라당 활동은 곧 일제 헌병대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1943년 7월 체포되었다. 그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3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교육 활동을 하다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하여 고창 중,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15년 6월 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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