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용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최덕용(崔德用)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최덕용은 189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장동리에서 태어났고 1919년 무렵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거주했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이원면 장날에 육창주(陸昌柱)·허상기·김용이(金龍伊)·조이남(趙伊南)·이호영(李湖榮)·공재익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었다.
3월 27일 당일, 그는 이원장터에 모인 3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배부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했다. 이때 육창주·허상기·김용이 등이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주재소로 몰려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유치장을 습격하여 김용이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이 사살되자, 그는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군중과 함께 사체를 헌병주재소 앞으로 옮기고 그를 살해한 자는 나오라고 위협했으며, 헌병대에게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폭행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이 곤궁해지자 전북 군산시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최덕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월 27일 당일, 그는 이원장터에 모인 3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배부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행진했다. 이때 육창주·허상기·김용이 등이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주재소로 몰려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유치장을 습격하여 김용이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이 사살되자, 그는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군중과 함께 사체를 헌병주재소 앞으로 옮기고 그를 살해한 자는 나오라고 위협했으며, 헌병대에게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폭행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이 곤궁해지자 전북 군산시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최덕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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