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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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조의 왕녀
청연공주 | 淸衍公主
조선 사도세자의 딸
청연군주 | 淸衍郡主
출생
사망
1821년(순조 21년) 6월 9일
(향년 68세)
부왕
모후
부군
광은위 김기성[2][3]
자녀
2남 1녀
(장남) 김재창
(차남) 김재삼
(장녀)

목차
1. 개요2. 생애
2.1. 탄생2.2. 혼인 생활2.3. 죽음
3. 유물4. 청연 공주를 연기한 배우

1. 개요 [편집]

조선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적장녀. 정조동복 동생으로, 청선공주의 언니가 된다.

본래 작위는 세자의 적녀에게 주어지는 정2품 군주(郡主)였으며, 1899년(고종 36)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추존하면서 청연군주에서 청연공주로 추증되었다.

2. 생애 [편집]

2.1. 탄생 [편집]

1754년(영조 30) 7월 14일, 당시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낳았다. 한중록에 따르면, 원래 출산 예정일은 6월이었으나 달을 넘기는 바람에 한산부부인 이씨[4]가 대궐에서 50여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그해 7월 14일에 내 청연을 낳으니, 영조께서 "백여 년 만에 군주(郡主)가 처음 나니 귀하다" 하시며 기뻐하시더라.[5]

《한중록》[6]

여기서 영조의 편협함이 드러나는데, 청연군주와 같은 해 2월에 태어난 은언군을 비롯해서 사도세자의 서출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7] 반면에 영조는 청연에 대해서는 어릴 적에 역질을 앓았다가 회복했을 때도 직접 보러 왔고, 혼인하여 일가를 이룬 뒤에도 사저에 들르는 모습이 보인다.[8]

2.2. 혼인 생활 [편집]

1765년(영조 41) 참의 김상익의 아들 김기성의 아들이 간택되어 같은 해 4월 11일에 혼인하였다. 그런데 정조가 남긴 존현각일기를 보면 김상익에 대해 좋은 평을 찾아볼 수 없다. 홍인한정후겸이 겨루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권세를 독점할 생각을 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왕세손으로 있을 때는 "소조(小朝)의 차대(次對)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고"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9]

20세이던 1773년, 동생 청선공주, 궁녀였던 후궁 의빈 성씨와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어린 나이에 혜경궁 홍씨의 궁녀로 들어온 의빈 성씨와의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때는 청연이 이미 혼인하여 궁 밖에서 생활하던 때였는데, 독서와 필사가 당대 왕실 여성들의 취미 생활로 추측된다.[10]

2.3. 죽음 [편집]

1821년(순조 21) 사망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자녀중 유일하게 어머니보다 오래 산 자녀이다. 청연은 남편과의 사이에 7남 2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 2남 1녀만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훗날 수원화성으로 능행할 때, 그녀의 두 아들도 동행한 외빈 명단에 있다.

왕세자의 딸이기 때문에 내내 '청연군주'로 살았다. 1899년(고종 36) 고종이 5대조를 추존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공주(公主)로 추증되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공주'로 살았던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는 셈.

3. 유물 [편집]

  • 《청연군주 노의》: 우리나라 복식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유물로, 1963년 경기도 광주에서 청연군주와 김기성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발굴한 200여점 중 하나다. 노의(露衣)는 왕세자빈, 왕세손빈, 내명부 여성과 대군의 정실인 부부인, 왕자의 정실인 군부인 등 정4품 이상의 정실부인이 착용하였다.
  • 《청연군주 당의》: 18세기 궁중용 당의의 모양을 알 수 있으며, 금실을 넣어 짠 석류와 칠보, 겉저고리와 안저고리 2겹으로 한 벌을 이루는 당의다.
  • 《청연군주 토황색 명주저고리》: 겹저고리 두 점이 끼워져 있는 4겹의 '두벌저고리' 형태다.

4. 청연 공주를 연기한 배우 [편집]

[1] 승정원일기, 영조 30년 7월 14일. # [2] 본관은 광산, 초명은 두성(斗性), 자는 성여(成汝), 호는 이길헌(頤吉軒),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3] 원래 광은부위였으나 청연군주가 청연공주로 추증되면서, 광은부위도 광은위로 추증되었다. [4]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이자 홍봉한의 아내. [5] 숙종인경왕후에게서 공주 둘을 얻었지만 요절하였고, 경종이나 영조는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 [6]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7]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라고 언급했다. 즉, 영조와 영빈 이씨 모두 사도세자의 서출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애정을 주지 않았다. [8] 영조실록 105권, 영조 41년 4월 12일 정사 2번째기사. # [9] 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2월 27일 기사 4번째기사. # [10] 숙명공주의 후손인 심익운의 문집 '백일집(百一集)'에서 효종인선왕후가 함께 《삼국지연의》를 번역,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 중 《손방연의》라는 책에는 영빈이씨의 영빈방 인장이 찍혀있으며,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도 《만석군전》과 《곽자의전》을 필사한 유물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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