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각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이명 | 채희각(蔡凞覺) |
자 / 호 | 성민(聖民) / 괴당(槐堂) |
본관 | |
출생 | |
사망 | |
상훈 | 대통령표창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채희각은 1894년 8월 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과 어머니 성주 도씨 도응호(都應浩)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희각은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학기와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경성감옥·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해 12월 11일 가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7년 10월 6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희각은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학기와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경성감옥·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해 12월 11일 가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7년 10월 6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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